매일묵상(2022/10/3-7)

잠언 19:25절
“오만한 사람을 치면, 어수룩한 사람도 깨닫는다. 명철한 사람을 꾸짖으면, 그가 지식을 얻는다.” (새번역)


‘오만한 사람’의 원어는 ‘레쉬’로서 마음이 교만하고 고칠수 없으며, 모든 책망을 거부하는 자를 지칭합니다. 술에 잔뜩 취해 이성을 잃고 제멋대로 주정을 부리는 사람과 같이, 그는 교만과 자아도취에 잔뜩 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25절의 ‘오만한 사람’은 그 정도가 낮아, 교훈을 받아들이는 어수룩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1-9장의 교훈의 대상인 ‘어리석은 자녀’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세상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잘 속아넘아가는 자녀들’이라, 징계를 받으면 지혜를 얻어 돌이킬 수 있습니다. 본 잠언의 ‘오만한 사람’ 역시, 매 백대를 맞아도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할 정도의 거만한 자는 아닙니다. 다만, 그의 미성숙 때문에 마음을 높이게 된 것이라서, 벌을 받으면 바로잡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상자가 미성숙으로 인한 오만한 자냐, 아니면 악한 자로 말할 정도의 오만함(9:7)이냐를 분별하여 합당한 훈육을 해야 합니다. 이같이 교육 혹은 훈계란 사랑과 지혜가 함께 작동해야만 하는 어려운 일로써, 바울 역시 이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 이에 반하여, 후단은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길로 접어든 사람을 말하며, 그런 사람은 계속하여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깨닫고 지식을 더합니다.“더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쓰여 있습니다.” (약4:6,현대인의성경).

잠언 19:26절
“아버지를 구박하고 어머니를 쫓아내는 자식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끌어들이는 자식이다.” (새번역)


25절의 ‘오만한 사람’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받지 못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며(26), 교훈을 듣지 않고(27), 진리를 존중하지 않는(28) 3 가지 특성을 갖게 됩니다. 그 전형적 행동이 ‘아버지를 구박하고 어머니를 쫓아낸다’는 본잠언의 묘사입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이 세상에 세운 질서와 권위의 가장 근본을 이룹니다. ‘동몽선습(童蒙先習)’(중종, 민재인)은, ‘효는 백행의 근본’임을 적어 놓았습니다. 출간 동기는 그 당시 풍속이 병들어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동하여 금수와 가깝게 됨을 애통하게 여긴 마음입니다. 물론 이 책은 유교 질서인 임금, 신하, 부모, 자녀, 부부 등 다섯 관계의 도리(오륜)를 가르치면서, 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단언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동몽선습’이 가르칠 수 없는 부모권위의 유래와 한계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해도 주 안에서 해야 하며, 그 계명을 어길 경우 섭리 가운데서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징벌하십니다. 이런 진리를 모르고 성장한 자녀들은, 어릴 때는 부모의 말을 듣지만, 성장하여 부모가 늙고 힘 없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같이 오만해집니다. 그들은 힘 없는 늙은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는 지경까지 타락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부끄러움과 수치를 끌어들이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필연이기 때문에, 자녀의 잘못된 행동은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지혜와 용기를 위해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엡6:4,새번역)     

잠언 19:27절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27절을 직역하면, “내 아들아 훈계(교훈)듣는 것을 중단하라, 그러면 너는 지식의 말씀들에서 떠나 방황할 것이다”, 이지만, 공동번역과 같이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을 등지려거든 꾸지람을 듣지 않아도 좋다.”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의미는 동일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계속 교훈을 듣고 삶을 바꾸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은 일생을 거쳐 끊임없이 계속되어야만 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제자들이 더 이상의 교훈이 필요없는 지점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본 잠언의 교훈을 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장소이기에, 지혜와 지식의 추구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만약, 귀찮다고 교훈에 등을 돌리면(27a), 지혜와 지식에서 떠나게 되고(27b), 부모에게조차 범죄하는 길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26). 정상적인 경우라면,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의 인간성은 두 번 재고할 여지도 없이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반역한 아담과 하와의 품행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불효막심한 행동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의 표상으로 볼 수 있는 부모에게 불순종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본 잠언을 쓴 솔로몬조차 자신의 교훈에 주의하기를 그친 순간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에서 떠났고, 우상 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건축한 성전 바로 앞 감람산에 산당들을 지어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참 어리석은 왕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잠언1:7,새번역).



시편117:1절
“너희 모든 나라들아, 주님을 찬송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칭송하여라.”(새번역)


이 시는 단 두 절이지만, 믿음은 위대하고, 시야는 전 세계에 미칩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온 세상의 메시야임을 전하는 근거로서 이 시를 인용하였으며(롬15:11), 그 완전한 성취를 요한계시록에서 미리 보고 있습니다: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계7:9,새번역). 시인은 1절에서 “모든 나라들아 주님을 찬송하며”라고 권유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의 핵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온 세상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천하 만민의 복의 통로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 규정은 이 언약을 반영하여 처음부터 이방인을 언약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내용을 포함하였습니다(출12:48-49). 490년 후 드린 솔로몬 성전 건축 기도에서도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왕상8:41-43). 또한 홍해를 가르신 것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한 표적들은 동시에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표적이었음을 시편 기자들은 선언하였습니다(예:96-98편). 모든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단 하나 뿐입니다.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입니다(2). 그것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심으로 명백해졌습니다 (롬5:8).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기쁨의 외침을 드리게 됩니다(2).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주님의 진실하심은 영원하다. 할렐루야” (시편117:2,새번역).

시편118:1절 – 호산나!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새번역)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해 불려진, ‘애굽의 할렐’은 본 시편이 마지막 시입니다. 시를 읽어가면 성전으로 가서 예배드리려는 백성들의 행진이 있고, 그 중심에 그들을 이끄는 한 예배자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예배의 목적은 시편116편과 같이 개인적 구원 때문에 감사제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에게 합당한 승리의 찬양을 올리려고 가는 것입니다. 많은 목소리가 들립니다: 예배의식(1-4), 개인적(5-14), 대중적(15f.)인 목소리들; 그리고 중심 인물과 그의 행렬이 예루살렘 성문에 접근하고 입성을 요구하고(19), 응답과 찬사를 받고(20, 26), 마침내 제단에서 순례를 마치고 있습니다(27). 시의 구조입니다.

     A  감사로의 초청(1-4)
         B 감사의 이유: 구원(5-21)
     A′ 감사 의식의 노래(22-29) – 호산나  이 시를 처음으로 노래한 사람들은 애굽에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긴 역사의 여정을 거쳐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끝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마지막 승리의 입성과 유월절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내용을 전하는 복음서를 읽으면 종려 주일과 고난주간의 메아리가 본 시편의 전체에 걸쳐 울려퍼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특히 22절이하). 즉 본 시편의 절정은 신약입니다. 출애굽과 성전이 예표한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을 통해 죄와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구원을 노래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를 자세히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셨고, 그 기록이 복음서입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