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2022/8/29-9/2)

잠언19: 11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사람 사이에 갈등은 필연입니다. 본 잠언은 분노를 포기하고 허물(페샤-죄, 선을 넘는 언행 등)을 용서할 줄 아는 사려 깊은 행동을 하라고 교훈합니다. 슬기로운(세켈-상황을 파악하여 합당한 행동을 취할 줄 아는 능력) 사람은 참을 줄 알기에, 뜨거워진 논쟁은 가라앉게 됩니다(15:18). 물론 쉽지 않습니다. 특히 타인에게 도를 넘는 말을 듣거나 처우를 받아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모두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그 분노를 그대로 발산시키면 평화로운 공존은 사라지고, 갈등과 불화만이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허물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지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후처로 취하였을 때,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면서 그의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겸손하였으나, 주님은 노하셨고 결국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립니다 (민12:1-3). 모세는 미리암을 위해 중보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만큼 분노는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밧단 아람에서 큰 부를 축적한 야곱은 외삼촌 라반 몰래 도망을 갔고, 라반은 불과 같이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날 밤 라반에게 현몽하여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라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야곱을 해하기를 멈추고, 자신의 딸들과 손자들을 축복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야곱과 라반의 기사 중 라반이 잘한 대목입니다(창31장). 이들 양자는 각기 허물이 있었기에, 이의 완벽한 모범은 당신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20).

잠언19: 12절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고대에는 제멋대로 통치하는 왕이 군림하고 있어, 신하들은 왕의 노여움을 피하고 그의 호의를 받는 것이 생존과 출세의 비법이었습니다. 사람의 분노의 결과는 언제나 어리석습니다만(잠14:17), 권세자 특히 왕의 분노는 먹이를 잡은 사자의 표호와 같이 두렵고 위험합니다. 당연히 조심해야 합니다. 한나라의 사가 사마천은 쓴 소리를 하여 한 무제를 격노하게 하였고, 궁형(남자의 생식기를 거세함)에 처해졌습니다. 너무나도 수치스러웠지만, 사마천은 굴하지 않고 역사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그 결과  20여년에 걸쳐 130편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역사책 “사기”를 완성했습니다. 후에 무제는 뉘우치고 중서령의 직을 내려 명예를 회복시킴으로써, 상과 벌을 마음 내키는대로 주는 전제군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전제군주의 권력도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롬13:1-7). 그러나, 여기에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라는 지혜와 섬김의 길이 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자신이 죽이고 살릴 권세가 있다고 위협하자, 주님은 오히려 위에서 그런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는 죄를 짓고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요19:9-11). 누가 재판장이고 피고인지 잘 모를 정도로 주님은 당당하셨지만, 그렇다고 72,000명도 더 되는 천군을 동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외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권세라는 사실을 존중하되, 그 권세를 남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지적하는 정의로운 비폭력의 자세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영광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벧전4:14).“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잠언19: 13절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솔로몬은 사회생활의 문제에서 가정으로 눈을 돌립니다(13-15). 13-14절은 역기능 가정(미련한 아들, 다투는 아내)과 순기능 가정(유산, 슬기로운 아내)을 대조하고, 15절은 미련한 아들의 전형이 게으른 자라는 것을 밝힙니다. 가정은 남편, 아내 그리고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고, 살아갈 물질적 터전(집, 재산)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특히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하였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연로한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받아 보전하고 부모를 섬길 조력자로서의 자녀들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녀가 유능하지 못하여 가업을 몰락시키거나,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한다면 그의 아비에게는 재앙 그 자체입니다. 한편, 가정의 평온 없이는 행복은 불가능하고, 아내는 그 평온으로 닻입니다. 많은 일로 걱정하는 남편을 위로하고 조언을 주어 함께 가정이라는 배를 안전하게 항진하도록 돕는 배필입니다. 그러나 지붕이 새서 빗물이 계속 떨어지는 것처럼 틈만 생기면 다투고자 하는 아내 역시 고통 그 자체입니다. 노년의 톨스토이처럼 그는 집을 나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다투는 아내’란 단순히 잔소리를 넘어 ‘미련하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가정은 늘 세파에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이때 슬기롭지 못한 아내는 그에 대처하는 지혜도 없으며, 사태의 본질도 자신의 위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감정과 생각대로 주장할 것입니다. 당연히 가정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대조적인 여인이 14절의 슬기로운 아내이고 그 좋은 예가 잠언31:10-31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잠언19:14,새번역)

시편110: 4절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4절은 하나님이 주님께 하신 두 번째 말씀으로, 그분은 레위 지파 제사장과는 관계 없이(출29:9),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맹세가 뒤따릅니다. 제사장 엘리의 집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때도 영원히 제사장직을 담당할 것이 약속되었으나, 엘리의 아들들의 범죄로 그 약속은 취소되었습니다 (삼상2:30; 왕상2:26,27). 그러나 다윗 왕의 주님이 영원한 제사징직을 수행할 수 있는 까닭은, 첫째, 맹세로 보증되었고, 둘째 그분은 결코 그 제사장직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왕좌에 앉아 공평과 정의로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림으로 영원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사9:7). 이런 영원한 왕과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죽지 않는 부활의 몸이 필연입니다. 한편, 멜기세덱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왕국을 다스리는 제사장이자 왕으로서 적군을 쳐부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구약 성경에는 창세기 14장과 시편110편에만 등장합니다. 신약 히브리서에서 이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한 신학적 설명이 있습니다(히5:5-10; 6:19-7:28). 다윗 왕의 주님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당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은 구원하시나(히5:5-10),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심판하여.. 머리를 깨뜨리실”(5-7)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짧은 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명백히 드러나 있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깨닫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3:12).

시편111: 2절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시편111-113편은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하나, 111편과 112편은 알파벹 시의 특색을 갖고 있습니다. 즉 두 시는 각각 22개의 행으로 구성된 10개의 구절로 이루어졌으며, 각 행은 히브리어 알파벹(22개)의 순서로 시작됩니다. 주제는 111편은 하나님 자신을, 112편은 하나님의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본시의 구조입니다.

A 하나님의 능하신 행위를 찬양(1-3)
         B 구속을 위한 주님의 일하심(4-9)
A′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10)

시인은 구속하신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일(기적)들을 연구하며 그분의 능력과 사랑을 깨닫습니다. 이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정의의 실현이요(3), 그 정의는 은혜와 자비를 동시에 구현하였습니다(4).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은혜로 주시고 백성이 행할 법도를 제정하여 세우셨습니다(7-9). 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법도를 지켜 의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여 가나안 족속은 쫓겨났습니다. 그 길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끝은 그분의 법도를 행함으로 ‘훌륭한 지각(sense)을 가진 자’로 칭찬받는 것입니다(10). 시인은 본시에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선하심은 그분이 행하시는 일(기적) 속에서 드러남을 선포합니다(3,4). 이같이 그분의 선하심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여기에 믿음 생활의 본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가 우리 삶 속에서 맺어지는 현실 속에서 세워져가기 때문입니다(빌1:10-11).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