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2022/08/15-19)

잠언19:5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거짓 증인’ 이란 재판장 앞에서 ‘거짓 증언’을 한 사람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법정은 증언에 의존하였습니다. 만약 증인이 거짓으로 말한다면 판결은 그릇내려지게 되고, 그 해악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나봇의 살해사건). 그러므로 십계명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명령하며, 본 잠언은 더나아가 거짓 증인에게 확실히 임할 부정적인 운명을 선포합니다. 십계명에도 나와 있는 금지명령을 본 잠언이 다시 한번 교훈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삶의 일반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여, 사회 규범을 어지럽히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웃의 생명, 재산, 명예에 위해를 가하고, 정직과 진실의 가치를 허물어 버립니다. 그 시작은 사탄입니다. 창세기 3장은 사탄이 거짓말을 통하여 인간을 타락시키고, 이들 모두가 재판장이신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율법에 규정된 죽음을 선고받았는지  상세히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귀를 거짓말쟁이요 처음부터 살인한 자로서 정죄하셨습니다(요8:44). 성경의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거짓의 위험에 대하여만 설명하지만, 성경은 그 기원을 알려주면서 인간에게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따라 진실되게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진리이신 우리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요14:6).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참된 것을 사랑하시고 거짓말을 미워하시는데, 이것이 성경이 거짓말을 금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잠언19:6절
“너그럽게 주는 사람에게는 은혜 입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고, 선물을 잘 주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친구이다”(새번역)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선물과 같은 적극적인 호의를 베푸는 자는 많은 친구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본 잠언은 솔로몬의 관찰 결과를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솔로몬의 의도를 알기 어렵습니다. 즉, 이 잠언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부터 호의를 얻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줄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풍자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각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나, 잠언 19:4절, “재물은 친구를 많이 모으나, 궁핍하면 친구도 떠난다.”(새번역),을 감안하건데, 세태를 풍자하기 위한 의도가 더 강하다고 보여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 너그럽게 주거나, 뇌물에 가까운 비싼 선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는 권력과 부를 함께 가진 통치자를 향해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이기적인 존재임을 감안하면서 관계를 맺어야지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의 모델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너그러우셨으며, 상황에 따라 적합한 가르침을 주셨고,  배반을 당하실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온유하게 대하셨습니다. 체포되시는 중에도 베드로가 베어낸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도층의 외식이나 잘못된 교훈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잡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중심에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사람을 얻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려면 그분의 온전하심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관계의 지혜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잠언19:7절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본 잠언에서 형제와 친구는 약간 다릅니다. 형제들은 운명공동체라 자신이 어려워도 더 어려운 형제를 도와 주지 않을 수 없어 미워합니다만, 친구 관계는 선택이기에 떠나면 그만입니다(17:17). 물론 관포지교, 문경지교 등과 같은 친구관계는 형제보다 친밀할 수 있지만 예외적입니다(잠18:24). 중요한 것은 형제와 친구를 포함하여 어떤 사람도 가난한 사람의 주위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는 현실입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은 극복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가 도움을 청하려고 친척과 친구에게 가도 소용없습니다. 놀부와 같이 냉엄하게 대하거나(잠18:23), 자리를 피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도우려고 해도 여유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전쟁이나 코로나와 같은 재앙이 올 경우 어떻게 할까요?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에게 가라고 조언합니다만(잠27:10), 이것은 너무나 빈약하여 현대 국가는 여러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안전망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사망 등). 누가 우리를 도울까요? 만유의 주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견고한 망대가 되십니다(잠18:10). 기도와 함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면 평강이 우리 마음을 점령하는 것은 물론(빌4:6-9), 기도의 응답을 받아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보이지 않지만 늘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다윗의 체험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편32:6).

시편109: 4절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편 150편 중 저주시는 단 세 편(58, 109, 137편)이며, 본시는 가장 길고 강력합니다. 시인은 다윗입니다. 왕 사울이 죽은 뒤, 항복하러 온 사울의 집 군대장관 아브넬을 요압이 암살합니다. 분노한 다윗 왕은 요압을 저주하나 죽이지는 않습니다(삼하3장).  35년 후 다윗은 임종 시에 솔로몬에게 요압의 처형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본시의 배경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라는 표현은 물론, 그의 후손까지 생명을 끊어 달라는(10,11) 강한 저주의 문구들을 읽을 때 다윗이 큰 고통과 배신감 속에서 지은 것은 분명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1-5절) 주님의 행동을 간구함, (6-20절) 주님의 공의를 간구함, (21-29절)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함, (30-31절) 주님의 구원을 감사 드림. 한편, 이 같은 저주의 기도가 정당성이 있을까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곤경에 처한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교훈합니다(잠25:21-22). 다윗 자신도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 온 원수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는데, 원수 사랑에 대한 주님의 뜻을 모를리 없습니다. 다만, 본시는 악에 분노한 성경 기자의 성경적 현실주의를 과감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허용되나 죄와 매우 가깝기 때문에(엡4:26), 이런 저주시들은 우리 삶의 모델이 될 수 없는 것은, 다윗 같은 “거룩한 분노 없이는 그것들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맥켄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시편109: 8절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신약의 기자들, 특히 누가는 본시편의 구절을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에게 적용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마태복음(27:3-10)과 사도행전(1:15-20)의 기사를 종합하여 보면, 은 30 세겔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는 그 돈으로 밭을 샀지만, 예수께서 정죄받는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절망한 그는 30 세겔을 성소에 던지고 목매달아 죽는 과정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루살렘 거주민들은 그 밭을 아겔다마, 곧 피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마태복음은 은 30량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다는 선지자의 예언(슥11:12,13)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한편 누가는 주님의 승천 직후, 120명이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가 일어나서, 가룟 유다의 죽음으로 시편69:25절,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가 성취되었기에, 시편109:8절에 예언된 대로 가룟 유다의 직분을 취할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에 회중은 맛디아를 선출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있기 1천년 전 기록된 본 시편을, 베드로는 어떻게 바로 가룟 유다의 배반사건과 사도직분의 선출에 적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사도의 직무 중 하나로서, 우리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열두 제자 중 수제자이고, 최초로 예수께서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며,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한 ­­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베드로의 이 해석과 고백 위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 사도 직분의 위대성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