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19: 2절
“지식이 없는 열심은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너무 서둘러도 발을 헛디딘다”(새번역)
사람은 성공하려는 강한 욕망을 갖고 ‘열심’(히브리 원어, ‘네페쉬’- 영혼)을 내서 일할 수 있으나, 만약 그 동기가 경건하고 바른 지식을 따라 나온 것이 아니라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숙고하고 기도로 주님께 맡긴 다음에 행동해야지, 두려움, 탐욕, 분노, 성급한 성격 때문에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싸울 때, 백성들에게 저녁까지 일체 음식을 먹지 말 것을 저주로 맹세시켰습니다. 맹세를 두려워 한 백성들은 하루 종일 음식을 먹지 못하면서 격렬한 전투를 치뤘고 저녁이 되자 기진맥진하였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삼상14). 한편, ‘발을 헛디딘다’ 혹은 ‘잘못 간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웃 사랑’의 윤리를 무시하는 생활방식을 함축합니다. 생각 없이 삶게 되면 범죄하기 마련이어서 주님을 격노하게 만들 것입니다. 생명이 위태롭습니다(20:2).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파산한 부자를 피하기 때문에 그 악에 물들지 않고, 결국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본 잠언은 영적인 열심에도 적용됩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열심이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쫓아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롬10:2).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그릇되이 이해하여 율법 안에서 영생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정작 생명을 주시러 오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님으로 선포되셨습니다. 이 주님을 알고 그분과 사귐이 없이는 영생도 없습니다(요17:3).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잠언19:3절
“사람은 미련해서 스스로 길을 잘못 들고도, 마음 속으로 주님을 원망한다.”(새번역)
본 잠언은 재물이 많은 바보가 거짓말이라는 죄된 행동과(1b), 좀 더 부유하려는 욕망(2b) 때문에 삶을 그릇치고, 그 잘못에 대하여 주님의 심판을 받자 자신의 도덕적 오만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원망한다는 어리석은 인간 존재의 실존(3)을 지적합니다. 더 나아가 그 거만한 바보는 자신이 우주의 지배자인양 높이고 자신의 죄된 삶에 상당한 보응을 내리신 주님(도덕의 통치자)께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목적 달성을 못하고 파산하게 된 것을 분노합니다. 실패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술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작든 크든 간에,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음을 보아 그의 어리석음이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손상을 입혔음은 명백합니다. 그의 교만한 자아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이라고 지혜자라고 인생에서 늘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들에게도 뜻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전9:11). 하지만, 그들은 주님을 알기 때문에 신뢰합니다. 그러면 바보의 실패와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실패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외양은 똑 같은 실패의 모습이나, 전자는 심판이고, 후자는 훈련입니다. 이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회개하지 않고 주님을 원망하지만, 지혜자는 자신을 되돌아 보고 거기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여 고칠 것은 고치면서 신실하게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갑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세상의 성공 보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고 하나님께 감사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획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결국 모든 일이 유익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롬8;28,현대인의성경)
잠언19: 4절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18:22-19:7절은 ‘가난, 재물 그리고 친구’를 다루는 단락이며, 19:4-7절은 이 단락의 결론으로 다시 한 번 친구와 재물이 가지는 도덕적 모호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친구와 재물은 도덕적으로 선악을 뚜렷히 구분짓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은 부자의 친구로 남기 원하지, 가난한 자와 교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가난한 자는 문제들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도움이나 관대한 지원을 필요로 하지만, 부유한 자는 최소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외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의 친구들이 참된 자들일까요? 만약 그들이 참되다면, 4절은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며, 가난하더라도 친구가 끊어지겠는가?”라고 읽어야 합니다. 어떤 뉘앙스이겠습니까? 전도서가 답을 줍니다 :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 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전5:11). 즉 재물은 친구들을 불러들이지만 그들은 거머리들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의심이 많고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실로 각 사람이 친구를 사귀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줄 것인가의 관점이 아니라, 그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반대를 말합니다. 주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재물을 사용하여 친구를 사귀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보답을 받으라는 권고하십니다(눅16:1-9).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친구 사귀는 비결입니다. 받으려는 관점이 아니라, 도움/재물을 줄려는 관점 말입니다.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시편108: 4절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 하늘보다 더 높고, 주님의 진실하심, 구름에까지 닿습니다”(새번역)
다윗은 시편 57:7-11절(1-5)과 시편60:5-12절(6-13)을 합쳐서 새로운 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시편57편과 60편을 전혀 모르더라도 시편108편은 고유한 가치가 있습니다. 배경은 다윗이 에돔과 전쟁할 때였습니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에 닥쳐온 위기 극복을 위한 기도의 관점에서 보면, 3연(1-5, 6-9, 10-13)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연은 주님의 변함없는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주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5). 둘째 연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6). 셋째 연은 ‘에돔’의 위기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해결받기를 기도합니다(12). 이것은 성서적 기도의 참된 순서로서 이 시에서 무엇보다 강조하는 교훈입니다. 도움이 절실 할 때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품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각 연에서 이에 관한 특별한 진리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a) 하나님의 ‘인자하심’(4)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진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실체인 구름(궁창)에 이르지만, 그분의 ‘인자하심(= 한결 같은 사랑)’은 하늘들보다 훨씬 높으십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지 못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떼문입니다(요3:16). 부활의 약속과 주님과의 영원한 교제(영생)를 누리게 하셨는데(영생) 기타 자잘구레한 세상사야 무슨 큰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시편108:1)
시편108: 10절
“누가 나를 견고한 성으로 데리고 가며, 누가 나를 에돔에까지 인도합니까?”(새번역)
본 시는 세 연(3연(1-5, 6-9, 10-13)으로 나누어지고, 각 연마다 하나님에 대한 특정한 진리를 강조합니다. 첫째 연(1-5)은 ‘주님의 한결 같은 그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며 우리의 모든 상상을 넘는 위대하신 그분의 인자와 진실하심을 노래합니다. 위기 시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진실하심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둘째 연(6-9)은 가나안 지역의 통치와 정복에 대한 주님의 이전 약속들을 회상합니다. 세겜과 숙곳(7)은 요단의 동서쪽에 위치하며 팔레스틴 지역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용사이며, 이스라엘(길르앗, 므낫세, 에브라임, 유대로 상징)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8). 당연이 이웃 국가들(모압, 에돔, 블레셋)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해야만 합니다(9). 시인은 이런 약속에 근거하여 도우심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Yes”가 됩니다(고후1:20). 그러므로 고난 시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연(10-13)은 에돔 정복을 위한 도움을 간구합니다. 시인은 오직 주님만이 자신들을 인도하여 견고한 에돔 성읍을 점령하게 하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12). 그 권능의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돌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필요로 하는 모든 도움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11-12). 실로 우리가 곤란 속에 있을 때, 그것과 맞서도록 힘을 주시는 분은 부활, 승천하여 대권을 가지신 주님 한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승리를 얻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원수들을 짓밟을 것이다.” (시편108:13,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