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07: 10,11절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07:10-16절은 두 번째 곤경(감옥에 갇힌 죄수)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들의 불행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약속을 의도적으로 파기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말씀, 율법)를 거역하였고 자발적으로 그분의 권위를 멸시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은 예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받았으나, 의도적으로 깨뜨림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계명은 받았으나, 지존자의 뜻을 마음에 새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중요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존중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에덴 동산에서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설득하여 마치 하나님이 그들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하고자 선악과를 금지하였다고 믿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에 속아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에야, 이들은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정의는 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속박과 수고와 저주와 사망이 선고되었습니다(창3:16-19). 세상은 원래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어졌지만 범죄로 감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인간 실존의 장벽조차 하나님의 자비로서 무너지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요8:31,32). 그것이 죄사함과 부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13). 그러면 은혜가 이 기도에 반응하여 죄와 사망의 쇠빗장을 깨뜨리고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놋대문을 부수시고, 쇠빗장을 깨뜨리셨기 때문이다”(시편107:16,새번역).
시편107: 17,18절
“어리석은 자들은, 반역의 길을 걷고 죄악을 저지르다가 고난을 받아 밥맛까지 잃었으니, 이미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새번역)
107:17-22절은 세 번째 곤경(죄로 병든 자)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것은 지존자에게 반역한(11) 모든 자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의 또 다른 묘사입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로서(잠1:7), 잘못된 길을 사랑하여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죽음에 다다르자 그들이 사랑한 음식과 쾌락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통 중에 부르짖었을 때 주님은 자비로우시게도 그들에게 구원을 보내셨습니다. 그 구원은 그들이 거부하여 그들을 정죄한 바로 그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제 정죄의 말씀이 약속과 위로와 회복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그들은 당연히 주님께 감사드려야만 합니다(21). 그 감사는 빈 말이 아니라, 주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마음이 담겨 하는데, 시인은 그 구체적 표현으로 ‘감사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합니다(22). 우리 본성 가운데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뿌리 깊어,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그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롬8:13). 그러나 그 길은 우리를 낮추고 사망(현재는 자기파멸과 미래에는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하는 멸망의 길입니다(17,18). 그러므로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를 통해 죄에 대한 위대한 해독제인 치유의 말씀이 내면화될 수 있습니다(20).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곤경에 빠지는 것처럼(11), 영적 온전함을 되찾는 방법 역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삶에 되돌아와야 가능합니다(20). “단 한 마디 말씀으로 그들을 고쳐 주셨고, 그들을 멸망의 구렁에서 끌어내어 주셨다.”(시편107:20, 새번역)
시편107: 26절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그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새번역)
107:23-32절은 네 번째 곤경(폭풍을 맞이한 바다의 선원/상인들)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같은 곤경이지만 광야와 바다는 종류가 다릅니다. 부를 찾아 바다를 항해하는 상인들은 그 큰 배를 너무나도 쉽게 뒤 엎어버리는 바다의 위력을 목격하게 됩니다. 만유를 창조하신 주님은 쉽게 폭풍을 일으키시기도 하고(25-27) 잔잔하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29-30). 그러므로 고난 중에 선원들은 기도하게 되고 주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사 바다를 잔잔하게 하십니다. 그 기쁨이 너무커서 선원과 상인들은 예배와 장로들의 모임에서 주님의 행사를 선포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31,32). 여기서 바다는 적대적인 세상을, 항해는 그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완벽한 상징들입니다. 청명한 하늘에 돈을 벌기 위해 승선하지만 예기치 않게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폭풍이 불어닥쳐 위기에 놓이게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폭풍은 기도를 촉구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폭풍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탄의 책략이나 우리의 실수와 범죄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영적 지능입니다. 아무리 바다가 뛰어 노는 것처럼 위기가 닥쳐도 그분에게 의뢰하면 잔잔하게 하실 것이고(시편32:5-7), 기도의 문은 평화로 들어가는 입구임이 증명될 것입니다(29-30).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 우리들은 주님의 행사를 교회와 일터에서 감사드리고 간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시편107:31,새번역)
잠언18:24절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친구 선택의 기준은 양이 아니라 질에 있습니다. 본 잠언은 통상의 친구들(복수)과 참된 친구(단수) 사이를 구별하고, 전자는 결국 “해를 당하게” 만들고, 후자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친밀하다”는 분별의 지혜를 제공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적 생존은 쉽지 않았기에, 한 명이라도 진실된 친구는 ‘보험’과 같았습니다. 따라서 좋을 때만 모여드는 통상의 친구들만 있고 진실한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는 사람은 역경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한편, 자기 일에 열심인 자는 기술을 얻게 마련입니다(22:29). 이와 같이 신실한 사람이 지혜로울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전2:26). 미련한 르호보암 왕은, 원로들의 지혜로운 충고를 무시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교만한 친구들의 조언을 선택하여 국가 분단이라는 큰 해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과의 혈육을 넘는 친밀함과 신실함을 나누었습니다. 혈육이라도 가난하고 실패한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진실입니다만(19:7), 요나단이 죽은 지 10년이 넘은 후에도 왕 다윗은 비천한 그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돌보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재물을 쫓는 것과 유사 친구나 그런 동료에 속하는 것을 경계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현명한 자들 중 친구를 선택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러나 신실함이 혈육의 연대감을 넘어서는 친구라는 잠언의 이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으며 (요15:12-15), 교회는 주님께 힘을 공급받아 사랑 가운데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잠언19: 1절
“거짓말을 하며 미련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가난해도 흠 없이 사는 사람이 낫다.”
“19:1-3절”의 단락은 친구 없는 가난한 사람에서 거짓말하는 비윤리적인 부자(1), 그의 탐욕(2) 그리고 완고함(3)을 다룹니다. 잠언은 가난한 자는 성공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기 어렵지만(18:23,24), 그렇더라도 윤리적으로 살 수 있고, 그것은 비윤리적인 부자보다 더 낫다고 교훈합니다(19:1). ‘낫다 better than’는 말은 반드시 그런 길로 가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하여 사회적으로 존중받지는 못하지만 주님이나 현자의 가르침 안에서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거짓말하면서 하나님 앞에 미련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 있습니다. 언제까지 가난하겠습니까? 주님의 때까지입니다(전3:1). 거짓말하여 남으로부터 빼앗아 자신의 예금 구좌를 채운 자들은 꿀벌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부지런히 꿀을 모아 벌집에 채우면 양봉업자는 때가 되면 그 꿀을 모두 값을 받고 사람에게 팔아버립니다. 꿀벌은 이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이와 같습니다. 역경 가운데서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생은 물론 재물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은 그에게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악인이 열심히 모아들인 재물을 주님을 기뻐하여 그분의 가르침에 머무르는 자에게 몰아 주시기 때문입니다(전2:26). 물론 그 의인은 받은 지혜로 주님이 맡기신 재물을 바르게 사용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를 보고 탐욕을 내어 재물을 모으는 행위가 헛되다고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3:2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