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18:19절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이 잠언은 형제나 가까운 친구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암묵적인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친밀했던 사이가 갈등 관계로 바뀌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 관계 보다 풀기 어렵습니다. ‘형제’란 피를 나눈 친형제나 혹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서로 신뢰하는 사이라서 만약 서로 간에 이해상충, 배신 등으로 신뢰관계에 금이 갈 때 당연히 감정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게 마련입니다. 이 감정과 분노의 문제는 제일 다루기 힘듭니다. 마치 통행을 막기 위해 견고한 성의 문을 닫고 문빗장을 지르는 것과 같이 마음의 문을 닫아 관계를 끝내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적의까지 생겨나기 쉽습니다. 시편55편이 이런 감정을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가장 가까운 친구의 배신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제가 서로 연합하여 동거할 때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편도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133:1-3).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져 형제를 섬기고자 노력할 때 가능합니다. 이기적인 우리 자아를 우리 힘으로는 극복하기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성령님에 의해 인도받는 삶이며, 그 끝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잠언18:20절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열매가 사람의 배를 채워 주고, 그 입술에서 나오는 말의 결과로 만족하게 된다.”(새번역)
20절과 21절은, 갈등 상황에서 제자들의 행동과 언어를 다룬 단락(18:13-21절)의 결론입니다. 언어는 좋고 나쁨을 떠나 상대방에게 확실하고도 충분한 효과를 미치는 것은 물론, 부메랑이 되어 말한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솔로몬은 열매, 먹는다, 추수와 같은 농업 시대에 익숙한 비유를 사용하여 교훈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배’란 ‘그의 존재와 인격’을 나타내는 제유법입니다. 후단에 “(입술에서 나오는 말의) 결과”의 원어는 ‘소득 income’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비유의 원천을 과수원에서 밀밭 농사로 바꾼 것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만족하게 된다’라고 끝맺음 하여, 전단의 내용을 또 한 번 반복합니다. 이는 언어 사용의 결과가 필연적임을 강조합니다. 과수원이나 밀밭에서 과일이나 곡식을 재배하여 그 열매를 따서 먹는 것처럼, 이 잠언은 자기의 입과 입술이 마치 과수원이나 밀밭과 같으며 언어는 씨요, 말하는 것은 파종하며 거름을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절망에 빠진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갔습니다. 주님은 거의 모욕에 가까운 말로 거절하셨습니다. 그때 그 여인은 ‘주여 옳습니다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지혜롭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칭찬과 축복이었습니다. 우리 삶도 같습니다. 부활하사 대권을 가지신 주님은 섭리 가운데 우리 믿음을 테스트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말을 배워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15:28).
잠언18: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혀는 위험한 지체이기에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21절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려 있다”고 경고하여 신중할 것을 권고합니다. 먼저 우리는 언어의 힘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식축구의 전설 빈스 롬바르디 감독이 훈련 중 여러 번 실수를 한 어떤 선수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훈련이 끝나자 빈스 감독은 락커룸으로 가서 머리를 푹 숙이고 좌절하고 있는 그 선수(제리 크래머)를 격려하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너는 NFL에서 가장 뛰어난 가드가 될 것이다.” 그 말은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제리 크래머는 명예의 전당에 올라갔습니다. 이에 반하여 남을 배려하지 않는 언어사용은 자신과 남 모두를 파멸시키고야 맙니다. 율리우스 시저는 뛰어난 로마의 장군이자 문필가였지만, 황제가 되려는 야망과 자신의 재주에 대하여 자부심이 컸기 때문에 대화시 자주 면박을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주위에 있던 공화파들에게 암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정치가인 옥타비아누스는 언어 사용에 주의하면서 모욕을 참고 인내하였습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던지 심판 날(최후의 심판)에는 그것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고(마12:36), 야고보는 혀를 ‘불fire’이라고 정의하고 그 불이 지옥에서 나온다고 하여(약3:6), ‘죽고 사는 것’에 영원의 의미를 가미하였습니다. ‘혀’의 조종자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가 선한 말을 하고 그 열매로서 땅을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마5:5).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3:13)
시편106:7절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이 시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모든 권능과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믿지않고 오히려 반역의 길로 걸어간 이스라엘의 어두운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출애굽에서 시작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를, 찬양, 기도, 그리고 하나님을 구세주와 심판자로 바라보는 신학적 맥락 내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A 찬양으로 초대(1–2)
B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기도(3–5)
C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 구원(6–12)
D 이스라엘의 불신과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13–43)
C′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 절제(44–46)
B′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기도(47)
A′ 찬양으로 초대(48)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백성들은 기뻐 노래하였으나, 곧 어려움을 만나고 불평이 터져나옵니다. 이같이 그들의 믿음은 냄비입니다. 곤경에 처할 때마다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하기 바빴습니다. 레파토리는 늘 같았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나았다. 왜 광야로 끌어내어 우리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이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사건 사건이 닥쳐왔을 때 믿음의 반응을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이유를 깨닫고 순종의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요, 중생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3).
시편106:15절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지만,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습니다”(새번역)
작고하신 조용기목사님은 “영적인 복, 물질적인 복, 건강의 복”(요한삼서 2절)이라는 이른바 3박자 구원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본성 때문에 안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물질의 복과 건강의 복이 함께 오면 교만하여져서 마음의 가난을 의미하는 영적인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적인 복을 받아 겸손해지는 것은 좋으나, 물질이나 건강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누구는 ‘인격만큼’ 가지면 된다고 하지만, 인간의 탐욕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십니다. 그분은 환경 가운데서 당신의 가르침을 배우도록 하신 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져야죠!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서 실패하였습니다 (시편106:13-14). 그러나 보이지 않는 주님을 신뢰하는 삶 역시 인간 본성과 어긋나기에, 성령님 안에서 늘 기도하고 항상 성경의 가르침으로 욕망을 바꾸어야 합니다. 영적인 복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물질과 건강의 복 추구에 몰입하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 즉 영적인 복을 먼저 얻으려는 열망이 있습니다(중생의 결과). 각기 원하는대로 주십니다. 건강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물질을 얻고 그 물질을 우상으로 삼도록 허락하시나(마6:24),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세우는 축복을 주시되, 물질은 거기에 소용되는 만큼만 주십니다. 험한 세상 주님을 신뢰하며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여야 합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히13:5-6).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