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18:16절
“선물은 사람이 가는 길을 넓게 열어 주고, 그를 높은 사람 앞으로 이끌어 준다”(새번역)
잠언에서 ‘선물’ 혹은 ‘뇌물’과 관련하여 ‘맛탄’과 ‘쇼하드’가 사용됩니다. 후자는 늘 ‘뇌물’의 의미로 쓰이지만, 전자는 문맥에 따라 ‘선물’ 혹은 ‘뇌물’로 번역하여야 합니다(잠15:27). 16절에 나온 ‘선물’의 원어는 ‘맛탄’입니다만, 좋은 뜻 보다는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잠언은 공의가 뇌물에 의해 뒤틀릴 수 있다고 지적하지만(17:8, 23- ‘쇼하드’), 성경에는 감사 또는 호의를 받기 위해 선물을 보내는 경우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골리앗의 블레셋과 전쟁에 나선 아들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다윗을 통해 열 덩이의 치즈를 천부장에게 보낸 이새입니다. 또 다윗은 사울 왕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기 직전, 아말렉을 치고 얻은 전리품을 유대 장로들에게 보내어 환심을 샀습니다(삼상30:26). 그러나 선물과 뇌물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선물이어도 그 영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한 세무 공무원은 납세자로부터 촌지를 받았을 때 그 얼굴이 절대로 잊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대법원장을 역임하신 L 씨가 판사로 재직 시(1960-70년대), 누군가 케이크를 그분의 가정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L 판사는 집에 도착하자 마자 그 케이크를 화장실(변소)에 버렸습니다. 아이들의 실망감은 말할 수 없었지만, 조그만 선물 하나가 재판에 영향을 미치면 안됩니다. L 판사의 행동은 올바른 것으로 회자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세상은 영악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기로 굳게 마음 먹고 기도하면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잠언 18:17절
“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새번역)
본 구절은 송사를 다루는 재판의 경우 경솔하게 한 편으로 치우치지 말고 이해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의 말을 다 듣고 그에 따라 객관적이고 적합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교훈입니다. 사건의 진위를 가려야 하는 재판관은 원고나 피고 어느 한쪽의 말만 일방적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같은 사건도 보는 자의 관점과 이해관계 기타의 사정으로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해관계가 얽힌 재판의 경우는 불리한 사실은 숨기고 유리한 것만 골라 주장하기 때문에 한 쪽의 말만 들으면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본 잠언의 취지는 일상사에서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상대방의 말을 반드시 경청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란 모두의 주장을 듣고 그들의 입장과 견해를 살핀 뒤에 공정하게 판단하고, 적합한 조치를 취하는 사람입니다. 솔로몬 왕은 갓 태어난 아기를 두고 다투는 두 명의 창기의 송사를 해결함으로 지혜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어머니의 일반적 심리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오늘날 그렇게 해결하는 재판부는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유전자 분석)으로 친자관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상사에서의 다툼은 당사자들 사이에 잘하고 잘못한 것들이 서로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희 정승은 싸우는 두 여종이 와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할 때 ‘너도 옳고, 너도 옳고, 아내도 옳다’는 대답을 하여 다툼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이는 지혜로운 인간관계의 모범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 18:18절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
17절이 이해 당사자들의 주장을 전부 들은 후에 진위를 가리고, 분쟁을 해결하라고 하였지만, 본절은 인간의 지혜로는 결정하기 어려운 분쟁에 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중대한 사건을 맞이하여 제비를 뽑은 기록들이 등장합니다. (1)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삿1:3), (2)성전의 직무를 배분할 때 (대상24:1-5), (3)아이 성 전투의 패배 원인자를 가려낼 때(수7:14-26), (4)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선출할 때(삼상10:17-24) 각각 제비뽑기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2)는 공정성을 위해, (3),(4)는 이적이 뒷받침되었습니다. 즉 제비로 뽑힌 아간의 범죄 물증을 찾아냈고, 사무엘은 전 날 사울이 왕으로 뽑힐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이스라엘의 제비를 뽑는 사건에는 배후에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였습니다. 제사장이 가슴에 찬 판결흉배 속 우림과 둠밈도 비슷한 제도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를 선출할 때(행1:26) 제비를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성경에 나타난 마지막 제비뽑기 기록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에는 더 이상 이런 제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데 사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공평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제비를 뽑는 것은 지금도 합리적이고, 승복한다면 때로는 강한 자 사이의 분쟁해결을 위한 좋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인내를 가지고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대화를 나누어 해결해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16:32).
시편105: 1절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새번역)
105편과 106편은 시편 제4권을 끝맺음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과 불충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두 개의 흐름 속에서, 105편은 이스라엘의 애굽 체류부터 정복까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찬송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음을 만민에게 선포합니다(1,2). 시의 구조입니다.
A 찬양으로 초대 (1–6)
B 언약을 세우심 (7–11)
C 주님의 보호 (12–15)
D 주님의 섭리 (16–23)
C′ 주님의 보호 (24–36)
B′ 언약의 성취 (37–45b)
A′ 찬양으로 마침 (45c)
시편 기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신 역사를 세 단계로 일괄합니다. 첫째는, 족장시대로서(창12-50장) 언약의 제정, 가나안 땅에서 유목민의 생활, 애굽에서의 요셉 이야기를 포함합니다(7-23). 둘째는, 출애굽의 시기로서 (출1-12장)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고난, 모세와 재앙들, 출애굽하는 백성을 보여줍니다(24-36). 셋째로 광야의 여정을 거쳐 가나안 입성을 언급함으로 언약의 성취를 노래합니다(37-44, 여호수아서). 언약을 이루신 이유는 당신의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 되기 위함입니다(45). 약 750년의 역사를 45절로 요약한 본 시편은 때로는 신비롭게 행하시지만 언제나 백성을 염두에 두시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미리 계획하시며, 필요를 언제나 충족시켜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의 이런 형상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시편105:45).
시편105 : 17절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05편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이를 이루시는 섭리의 신비함을 노래합니다(16-23절).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팔려서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이야 절망하였겠지만, 그 사건은 야곱의 집 사람 70 명을 애굽으로 보내 민족을 만드실 계획의 출발이었습니다. 1,000년 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앞서 보내신 신비로운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그와 동시에 요셉의 인격을 도야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몰랐기 때문에, 큰 의문과 고뇌가 야곱과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요셉은 13년 간을 노예와 죄수로서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너는 이 어두움과 고통 속에서 나를 믿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여기서 합격한 요셉은 총리가 되어 다스렸습니다. 8년 후 큰 흉년이 닥쳤습니다. 형제들은 그 흉년 때문에 식량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 도착한 그곳은 총리 요셉이 있는 곳입니다. 신비롭습니다. 고난이 곧 축복이라는 그 신비말입니다. 우리 역시 고난의 한 가운데서는 요셉이나 야곱, 그리고 그 형제들과 같이 같이 답답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전혀 무관합니다. 요셉을 감옥에서 총리로, 궁핍에서 풍요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기근이라는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주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말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의 땅에 나그네가 되었도다” (시편105:2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