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98:1절
“새 노래로 야훼를 찬양하여라. 놀라운 기적들을 이루셨다. 그의 오른손과 거룩하신 팔로 승리하셨다.”(공동번역)
“칸타테 도니노”(오, 주님을 찬양하라!)로 알려진 이 시편은 ‘공동기도서’(성공회)에 삽입되어 있는데, 그 위치는 저녁 구약성서 읽기와 그것의 성취를 증언하는 신약성서 사이입니다. 시는 하나님의 승리(구원)(1-3)에 대하여 인간(4-6)과 피조물(7-9)의 찬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연(1-3)을 지배하는 ‘승리’의 주된 의미는 ‘구원’입니다. ‘예수(여호수아)’는 여호수아의 헬라어 발음이고, 의미는 ‘야훼는 구원이시다”입니다. 어디로부터 구원입니까? 죄로부터 구원입니다(마1:21). 시의 첫째 연에서 노래하는 이 구원/승리는 전적으로 초자연적이며, 오직 주님의 팔로만 이루신 업적(놀라운 기적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사건을 통한 심판과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형에 불과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미래에 있을 ‘주(야훼)의 팔’(사53:1)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실 것을 노래하는데, 그 ‘주(야훼)의 팔’은 다름 아닌 ‘주의 종’입니다(사53장). 신약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1:12-14), 예언된 주의 종임을 밝혀줍니다(행2:29-36; 4:30).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근거를 마련하시고 부활하셨고(히10:14),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성도들을 부활시키사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입니다(히9:28). 본 시편에서 부르는 ‘새노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14:3).
시편99:4절
“주님의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평의 기초를 놓으시고, 야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셨습니다”(새번역)
시편 99편은 찬양과 예배를 명령하며, 100편은 이에 화답하여 ‘온 땅’이 찬양합니다. 99편의 주제는 ‘예배로의 초청’이고, 3번의 ‘거룩’이라는 후렴구가 등장합니다: (1-3) 거룩하신 분의 은혜, (4-5)거룩하신 분의 율법, (6-9) 거룩하신 분과의 교제. 첫 단락은 거룩하신 왕의 위대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 ‘만민이 떨고, 땅이 흔들릴 것’이지만, 그분은 ‘시온에’ 그리고 ‘그룹 사이에 좌정’해 계십니다. 이 장소들은 백성에게 말씀하시고(출29:42-46), 죄를 속하시는 곳(출25:17-22)으로, 그분이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정의와 동시에 은혜도 잊지 않기 때문에 위대하십니다. 이어 시인은 ‘야곱’을 등장시켜 공의를 행하라는 율법을 받았지만, 여전히 옛 야곱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우리를 빗대어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시는 완전한 ‘율법’에 직면하면, 늘 은혜를 갈구하게 되는데, 이는 비틀거리며 걷기 때문입니다. 이 정의의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지성소 언약궤 위의 ‘시은좌’에 앉아 계시는 분의 발등상에 경배하도록 만듭니다(5). 마지막으로 시인은 ‘모세’ ‘아론’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증거와 율례’를 지키면서 주님과 동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 명령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구약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모두 결함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우리 주님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6)
잠언18:4절
“슬기로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세차게 흐르는 강처럼 솟는다.” (새번역)
현자의 말은 심오하며 때로는 신비스럽기까지 한 지혜를 담고 있어서, 심사숙고를 해야만 합니다(깊은 물). 잠언은 지혜자의 이 특성을. ‘물’이라는 소재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건조하여 생수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땅속 깊이 흐르고 있어 건져올리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기(겨울철)에는 비가 내리고, 말라 있던 강(와디)에 격류가 흐르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스라의 철병거 900승이 말라 있던 ‘와디’인 기손 강을 통해 진격하고 있을 때, 상류인 다볼산에 비가 내렸고 이는 순식간에 기손 강을 격류로 변화시켰습니다. 철병거 900승은 물 속에서 전멸당하였습니다(사사기). 한편, 현자에게서 나오는 지혜는 “세차게 흐르는 강”처럼 솟아나 끊임없이 생수를 공급하기 때문에, 그 지혜에 목마른 자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줍니다. 잠언 3천 개를 말한 솔로몬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샘”에 비유될 수 있는 지혜자로서, 우리 주님을 상징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전 인류에게 주신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그 복음은 우리 모두의 깊은 갈증과 절망을 한 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 속에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요3:13-21). 아들을 보내주신 이 사랑을 깨달아야 비로서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잠언18:5절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본 잠언은 악인의 권력 남용을 경계합니다. 특히 정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재판에서 사악한 것들, 즉 뇌물 수수, 위증, 차별적 대우, 편견, 압력, 연줄 등으로 인하여 그릇된 판결이 날 경우 개인의 삶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됩니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창조주가 정하신 “의의 열매”를 산출해 내야 인간들 사이에 화평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다투는 재판정에서 이 문제는 특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증거가 부족하고, 재판관의 재량이 많이 작용하던 고대 이스라엘 국가의 경우에도 약자 편에 서서 올바르게 내려지는 재판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악인을 두둔하는 것”으로 의역된 원문은 “악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얼굴 즉 외모, 재산, 권세, 가문 등 재판에 있어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외적인 것들을 보고 일방적으로 편들어 주는 행위(24:23; 신10:17)를 보여줍니다. 후단에 “억울하게 하는 것”의 원어는 ‘기울이다, 치우치다’입니다. 이 또한 뇌물과 위증, 권모 술수, 사회적 신분 등 외적인 것 때문에 정의가 굽어져 의인을 억울하게 만드는 재판을 묘사합니다(출23:2).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인데(고전6:3), 하물며 세상 일을 공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주님만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만약 판단할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약1:5).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일용할 양식(지혜, 건강)을 공급받는 삶,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2:9).
잠언18:6절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바보는 언어를 남용하기 때문에 다툼(소송)을 일으키지만, 해를 당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교훈입니다. 전단을 보면, 그 바보는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입술을 열어 마구쏘아 대고는,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듣는 자는 그 부당함에 분노하거나, 말투나 인격모독적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다툼이 시작됩니다. 다툼의 결과는 미련한 자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는데, 후단은,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한다”, 고 말하여 역설적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는 세상이 타인을 배려하고,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샬롬이 만들어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보가 열변(?)을 토한다면, 듣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동정심 대신 적개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매를 자청하다”는 표현은 재판관의 명령에 의해 불법을 행한(명예 훼손, 모욕 등) 벌이라고 이해하여야 합니다(19:29). 타락한 관리를 부추켜 죄 없는 자를 매질하려고 시도하다가 자신이 매질 당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10:11, 18). 이에 반하여, 현명한 사람은 갈등을 피하거나(17:1, 14),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15:18). 그러므로 잠언은 다툼을 멀리하면 영광이 된다(가정과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의미)고 합니다(20:3). 우리로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먼저 사건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시37:5-7). 그 후에야, 악한 자를 감정으로 대적하지 않고, 정의의 길만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양보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마5:40,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