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6/06 – 10)

잠언 18:1절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잠언 18:1-21절의 구성입니다.
(1)미련한 자의 반사회적 언어습관(18:1-11)
   (가)어리석은 자의 반사회적 성격, 행동과 결과(1-9)
          서론(1-3) 어리석은 자는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본론(4-8) 미련한 자의 왜곡된 언어습관
          결론(9) 바보는 사회를 약탈한다.
   (나)주님 안에서 의인이 가지는 방패(10-11)
(2)지혜자의 화목하게 하는 언어습관(18:12-21)

바보는 ‘사람을 싫어하며 고집불통’의 특성이 있습니다(1,2). 그래서 공동번역은 “남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사람은 외톨이가 된다”로 의역하였습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란 비사교적인 사람을 묘사하는데, 문맥 상 그는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바보입니다 . 그 바보는 자신의 갈망- 돈, 명예, 권력 등 -을 성취하려고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어도, 자신의 목표와 상관없다면 다툼(소송)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타인에게 냉담하고, 경건하지 못한 것은 물론 합리성까지 결여되었습니다. 창세기(13장)에서 롯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 요단 동편을 선택하여 모든 소유를 이끌고 소돔 성을 향해 갔습니다. 소돔 땅은 풍요로운 지역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돌라오멜 왕에게 다른 소돔 사람들과 함께 잡혀갔다가 아브라함이 구출해 주었고, 소돔 성이 멸망할 때 역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가족만 구원받았습니다. “미련한 자는 깨우쳐주는 말을 싫어하고 제 생각만 내세우려 한다” (잠언18:2,공동번역).

잠언 18:2절
“미련한 자는 깨우쳐주는 말을 싫어하고 제 생각만 내세우려 한다”(공동번역)

2절은 닫힌 마음과 열린 입을 가진 미련한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추구하려고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1절)와 동일시 됩니다. 그 바보는 ‘깨우쳐주는 말(명철)’은 싫어하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성취하기는 좋아합니다. ‘깨우쳐주는 말’ 혹은 ‘명철’의 원어는 ‘테부나’이며 ‘분별’을 의미하는 ‘빈’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호크마)와 심히 많은 총명(테부나)’(열상5:9), 히람이 놋을 다루는 ‘총명(테부나)’이 이것을 말합니다 (왕상7:14). ‘기술’로도 번역되기에, 미련한 자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의의 기술’을 연마하지 못한 사람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크게 총명하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도제의 기술은 어설프기만 한데 도제가 도공의 지혜를 무시하고, 제 생각대로 굽는다면 좋은 도자기는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만약 미련한 자가 현자의 깨우치는 말을 싫어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마구 말을 한다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입니다(10:8; 14:3). 그러나 그 바보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드러낼 경우 자신의 미련함이 알려져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12:23; 13:16). 욥의 세 친구는 욥의 깨우치는 말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행위를 논하다가 심판 받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물론 욥의 중보기도로 벌을 면하였지만, 그들의 말을 읽어 보면 욥과 하나님께 대하여 너무나도 단순하게 판단한 잘못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벌과 모욕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 (잠언18:3,새번역)    

잠언 18:3절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 (새번역)

본 잠언의 ‘악한 사람’은 1절의 반사회적인 분리주의자, 2절의 미련한 자가 발전된 형태입니다. 그에 대한 벌로서, ‘멸시’와 ‘모욕’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보는 스스로를 제일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깨우쳐 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 결과 그 악인은 주님 앞에 죄를 범하여 벌 받고 공동체에 의해 멸시당합니다. 전단에서 ‘….이 오면…뒤따르고’란 원인(악인)과 결과(멸시)의 필연적 관계를 말합니다. 여리고 성 전투 시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페르샤 산 외투 한 벌과, 금 한 덩이를 숨겼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아이 성 주민에게 패배합니다. 아간의 범죄는 드러났고, 그는 가족과 함께 처형당하였습니다.  그의 수치는 씻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할 경우 ‘모욕, 망신’은 당연히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후단은 악인의 부끄러운 일이 심판을 받고. 사회의 치욕거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예24:9). 그러나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교만, 탐욕,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비시 600년 경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 왕과 백성이 그러하였습니다(예29:18-21).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바벨론 군대에게 항복하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계속 전하였습니다. 이 메시지는 시드기야 왕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지혜와 생명이었지만, 어리석게도 왕 시드기야와 백성은 불순종하였습니다. 얼마 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왕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감과 동시에, 다윗 왕국은 영원히 막을 내렸습니다.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언18:4).

시편96: 2절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이 시는 야훼께서 왕이 되심을 노래하는 시편들(93-100)에 속하고, 배경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의 장막에 안치시킬 때(다윗 시대)로 보입니다(역상16장). 주제는 모든 신 위에 통치하시는 왕으로서의 주님(야훼)입니다. 시편의 구조입니다.
     A   찬양의 선포(1–3)
B    주님의 위엄(4–6)
A′   찬양의 선포 (7–9)
B′   주님의 통치 (10–13)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매일 ‘찬양’하는데 능동적이어야만 합니다. 이를 통해 주님의 위엄과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 그분을 또 찬송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야훼의 구원(2), 기이한 행적(2), 의로운 통치(10), 만물의 창조주(5), 만유의 회복(11,12),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13)을 묵상한 뒤, 경외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같이 노래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거나, 성취될 것입니다. 출애굽을 통한 구원 사건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장소만 이전하였지 여전히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주인은 바로에서 야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되신 야훼(하나님의 아들)가 친히 인간이 되셔서 모세와 같이 우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나라(부활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구원하고 있는 과정이 신약의 구원 사건입니다. 그 동인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방법은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요3:16).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님의 순종과 희생이 새노래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확실한 심판이 전제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96:13).    

시편97: 1절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뛸 듯이 기뻐하여라.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새번역)

이 시의 초점은 의롭게 심판하시는 만유의 주님(야훼)입니다. 그분은 두렵고 엄위하시며(3-5), 공의롭게 다스리십니다(2). 주님의 심판으로 세상은 자유함 받아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1).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나(6-9), 주님을 무시하고 우상숭배와 헛된 것을 추구한 모든 사람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7). 시인의 이 같은 선포는 하나님 아들에 의한 최후의 심판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요5:27-30).  멸망당한 다윗 왕국은 하나님 나라를, 왕 다윗은 그 나라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다윗 왕은 죽었지만, 그분의 후손인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승천하여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재림하셔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행17:31).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인으로 부릅니다(8,12).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10). 왜냐하면 그분이 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이라! 주님의 통치는 먼저 신자의 삶 속에서 ‘의의 통치’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누구를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본 시편은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는” 주님(야훼)이라는 신학적 대답을 줍니다(9).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주님을 기뻐하여라…감사를 드려라”고 말합니다(10-12). 세상은 험악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님의 돌보심과 구원의 약속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10).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