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5/30 – 6/3)

시편 95: 1절
“오너라,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새번역)

본 시편의 주제는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주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순종 사건들을 돌이켜 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홍해를 건넌 후 2개월 즈음에 시내 산 앞까지 이르렀습니다. 광야의 길을 걸은 백성과 짐승 떼는 목이 말랐습니다. 모세는 위급하여 주님께 부르짖으니 호렙 산 반석을 쳐서 물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곳을 ‘맛사(시험)와 므리바(다툼)’라 이름하였습니다. 이는 백성이 자신은 물론 주님과 다투고, 주님의 임재 여부를 시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출17장). 같은 사건이 38년 후 신광야에서 또 한 번 일어났습니다. 물이 없어 목마른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자, 물을 줄 능력이 없는 모세와 아론은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님은 회중을 모아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이 나오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화를 내면서 반석을 두 번이나 쳐서 물이 나왔지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는 못하였습니다. 신 광야 지역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 지팡이로 때리면 간혹 고여 있던 물이 나오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이 나오도록 순종해야만 하였습니다(민20장 므리바 사건). 이 사건의 핵심은 위기가 닥치자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고 시험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떡으로만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신앙 생활의 핵심은 ‘순종’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회고하여 경고하고,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본 시편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순종을 격려합니다. “내가 화가 나서 ‘그들은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맹세까지 하였다.”(시편95:11;히4:5).

시편95: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홍해를 건넌 후 시내 산까지  2개월 동안, 주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시내 광야에 이르자 물이 없어 다투는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출17:1-7), 시내 산에서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하고도 남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주님을 불신하고, 시험하고, 불순종하여 결국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9-11). 그들의 후손인 시인은 하나님을 구원의 반석(1), 목자(6-7), 율법의 수여자(7-11)로 규정하면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이런 경고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들의 후손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표적들을 의심하고 믿기를 거부하면서 다른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한편, ‘내 안식’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과 관련하여는 가나안 땅이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3:7-4:13절은 이를 상론합니다. 히브리서는95편의 의미를 이스라엘에게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오늘’(95:7)은 바로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이며, 거기에서 명령한 ‘너희들’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며, 약속된 ‘안식’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임을 말합니다. 이런 권면을 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되돌아 가려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본 시편과 히브리서의 경고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히4:14새번역)

잠언17:26절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은 선하지 못하니라”

본 잠언은 17:23절(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보다 한층 안 좋은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사법제도 자체를 뒤집어 엎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하다’의 원어는 ‘아나쉬’로 ‘벌금을 매기다’를, ‘의인’은 문맥 상 ‘죄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죄 없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것을 넘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직한 귀족을 매질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재자 자신을 위함입니다. 이 잠언은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설립된 이래 1987년 민주화를 위한 평화시위가 성공할 때까지, 본 잠언이 글자 그대로 실현된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비시850년 경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시대에, 좋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던 나봇이 그렇습니다. 이세벨의 지시에 의하여 나봇과 그 가족은 불의의 재판을 받고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모두 두려워 침묵할 때,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린’ 전형적인 사건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시인하자 신성모독으로 사형에 넘겨졌고, 총독 빌라도에게 쇠고리가 달린 채찍으로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부활시키사 그분의 주장이 맞다고 옹호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를 드러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시 때때로 주님을 의지하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17:27)

잠언17:27절
“배운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지혜 있는 사람은 언제나 침착하다.”(현대인의 성경)

27절에서 ‘지혜자’란 말을 가려서 하고 감정표현을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이의 근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식입니다. ‘배운 자’는 참되게 지식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호크마)’란 ‘지식(다트)’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공기역학법칙을 먼저 숙달하였기 때문에 최초로 비행기를 날렸습니다. 자동차 기술자는 자동차의 구조와 기능을 알기 때문에 능숙하게 차를 수선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의 삶의 태도는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요, 목표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어떤 상황 하에서도 피할 길을 주님이 마련해 놓으셨다는 믿음이 있으며(고전10:13), 경험을 통해 증거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침착합니다. ‘침착, 냉철함’ 이것이 두 번째 요소입니다. 성품이 냉철하지 못한 자는 지혜자(명철한 자 혹은 분별력 있는 사람)가 아닙니다. ‘침착’과 ‘지식’은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알기 때문에 침착할 수 있고(숙달된 군인), 침착하기 때문에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곤욕과 심문을 당하셨으나  침묵하셨습니다(사53:7).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고난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침묵하셨고, 침착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속죄권을 받으시고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역경을 당할 때 이 진리를 묵상하고 잠잠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17:28)

잠언17:28절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아브라함 링컨의 말입니다: “입을 열어 모든 의심을 제거시키는 것보다 입을 다물어 너를 바보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28절에서 솔로몬은 어리석음을 감추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도발을 받았을 때 입을 다물고 마음을 다스리도록 교훈합니다. 지혜로운 자라도 말을 많이 하면 허물을 면키 어렵기에, 잠언은 입을 다물고 잠잠한 사람을 슬기롭다고 칭찬합니다(10:19). 하물며 어리석은 자일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어리석습니까?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26:12). 전문가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기에 말을 조심합니다. 약 1년 전 네이버와 카카오 라는 회사의 주식이 올랐을 때, 어느 유명 애널리스트는 무조건 두 회사의 주식을 사서 5년 보유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투브 영상을 올렸습니다. 얼마 후 시장은 두 회사의 세계시장에서의 성장가능성을 확신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주식은 반토막 났고, 그는 유투브에서 사라졌습니다. 바보가 현자로 여겨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28절이 가르치는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분노를 즉시 드러내고 매를 자청하는 바보도 한 번 참으면 이렇게 지혜로워 보이는데, 슬기로운 사람의 경우는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현자는 분노할 때 자신을 방어하려고 경솔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충분히 조절한 후, 신중히 처신함으로써 상대방의 실수를 우정으로 회복시키고자 노력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런 잠언의 문맥에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