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5/16 – 20)

시편93:1절
‘주님, 주님의 왕위는 예로부터 견고히 서 있었으며, 주님은 영원 전부터 계십니다.”(새번역)


93-100편까지, 7개 시편은 주님(여호와)께서 왕이 되신다는 주제를 강조합니다. 93,94편은 모든 땅 위에 통치하시는 왕을, 95,96편은 모든 신 위에 통치하시는 왕을, 97,98편은 주의 백성의 마음속에 계시는 왕을, 99,100편은 성품 속에서 보여지는 왕을 각각 노래합니다. 본 시편은 짧고( 5구절), 한 장면만(물과 바다의 일렁거림) 묘사하지만,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영적 실재를 힘차게 선포합니다. 시의 흐름입니다. 1-2절에서 능력의 옷과 띠, 즉 왕복을 입으신 주님과 그분의 왕위(보좌)를 확언한 시인은 3-4절에서 혼란스러운 이 세상의 세력들의 요동침을 물과 바다의 일렁거림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주님이 행하신 많은 통치의 증거들을 묵상하면서, 시인은 영원한 평온을 갖습니다. 메시지는 확실합니다.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이유는 바로 통치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1절). 세상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역사적 사실(롬1:3-4)을 믿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학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의사와 그를 신뢰하는 환자의 관계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왕 같은 제사장 지위에 있습니다(벧전2:9). 당연히 시편 기자처럼 본 시편의 메시지를 경험하여 확실한 증거들을 가져야 합니다(마14:23-34). 그런 증거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온을 주는 것은 물론,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만듭니다. “주님의 증거는 견고하게 서 있으며, 주님의 집은 영원히 거룩함으로 단장하고 있습니다”(시편93:5,새번역).

잠언17:19절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죄를 사랑하는 자이며 부를 자랑하듯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이다.
”(현대인의성경)

17절이 선한 이웃(친구와 혈육)을, 18절이 어리석은 이웃(보증을 서는 친구)을, 그리고 19절은 싸움을 좋아하는 이웃을 다룹니다. 히브리 원문의 구조입니다.
     a1 “죄를 사랑하는 자(원인)
         b1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결과)
         b2“대문을 높이는 사람”(원인)
     a2“패망을 불러들이는 자”(결과)
주부는 ‘다툼’이라는 결과로부터 ‘교만’이라는 원인으로, 술부는 “죄(죄과)’의 원인에서 ‘패망’이라는 결과로 이전합니다. 말싸움을 포함하여 다툼의 원인은 교만에서 출발합니다. 잠언은 ‘대문을 높인다’는 말로 교만한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원래 교만한 자는 사람(친척이 장관이다)이나 물건(많은 재물)을 근거로 자신을 높입니다. 그리고 높은 절벽에 둥지를 튼 독수리와 같이, 위험은 접근이 불가능하니 이제 자기는 안전하다고 믿습니다.(오바댜4절). 당연히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그 소유자의 교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잠언은 거만한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인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려고 하나, 실제로는 그 자신의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국고를 맡은 대신 셉나(사22:15-19),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왕 여호야김(예13-19장) 그리고 페르샤의 대신 하만(에스더)이 그런 자들로서 모두 멸망당하였습니다. 멸망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어떤 죄도 하나님께 대한 것이며, 죄인의 마음은 먼저 하나님께 비뚤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잠언17:20)

잠언17:20절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말은 성품을 반영합니다. 악인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이 삐뚤어졌다(굽은)는 것과 거짓말(패역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혀”를 비교하는 것은 통상적인 잠언의 방법입니다. ‘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재앙을 경험한다는 말로서, 후단은 ‘재앙에 빠진다”는 직설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악인은 확실히 멸망합니다. 한편, ‘얻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므차’는 ‘마차(발견하다)’의 미완료형입니다. 미완료형은 행위가 진행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거기에 ‘로’라는 절대부정을 나타내는 부사를 붙여, 잠언 기자는 마음이 왜곡되고 심술궂은 사람은 복이라고 부르는 좋은 것을 찾아 헤메지만 얻는 것은 고사하고, 절대로 발견조차 하지 못한다고 교훈합니다. ‘패역(히브리어 ‘하파크’)’은, ‘어떤 것을 뒤집어 엎다, 전복시키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말로서 어떤 일의 진상을 거꾸로 뒤집어 엎는 자, 즉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빠지느니라’는 ‘떨어지다, 내던져지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팔’의 미완료형으로, 악인에게는 재앙이라는 무서운 결과가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보시고 당신의 뜻에 거슬려 살아가는 악인의 집에 계속하여 재앙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악인과의 교제를 피하여야만 합니다. 어떻게 악인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언어 생활과 삶의 결과를 주의하여 보십시요. 결국 마음의 상태와 언어의 생활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

잠언17:21절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21-25절까지는  미련한 자와 관련된 잠언입니다. 특히 21절과  25절은 어리석은 자녀 때문에 겪게 되는 부모의 불행을 말합니다. 전단의 ‘미련한 자’의 원어는 ‘케실’이며, 영적, 지적, 혹은 도덕적 일들을 어리석게 처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후단의 ‘미련한 자’란 ‘나발’이며, 무엇보다 신앙적인 일과 관련하여 미련한 자입니다. 그는 실질적인 무신론자로서,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좋은 예가 갈멜사람 나발입니다. 그는 사업수완이 있는 대단한 부자였지만 교만하여 다윗을 조롱하다가 공포에 질려 죽었습니다. 한편, 전단의 ‘미련한 자(케실)’는 기초적인 가족적 유대조차 무시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부모를 근심시킵니다(10:1). 후단의 미련한 자(나발)는  불경건한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입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좋은 예입니다.  실로 미련한 자의 아버지는 살아 있는 동안 낙이 없고 근심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가산을 탕진하여 아버지에게 커다란 부끄러움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맏아들 암논의 비도덕적인 행동, 둘째 아들 압살롬의 복수와 반역 때문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당하였습니다. 미련한 아들을 두지 않는 좋은 방법은 늘 기도하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훈계의 목적은 만유의 주님을 두려워 하는 지혜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교육을 자녀들에게 한 적이 없어 이스라엘 국가를 통일하고도, 말년에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17:22).

잠언17: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본문에서 ‘양약’의 원어는, ‘예티브- 좋게 만들다’와 ‘께하- 약, 치유’로 된 복합어 ‘예티브 께하”입니다.  그러므로 전단은 기쁨을 통해 몸과 마음이 치유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후단은 ‘마음의 근심이 ‘뼈를 마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뼈는  피를 생성해 내는 기관이기에, 잠언은 사람이 근심 때문에 육체적,정신적, 그리고 영적  생명이 마비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됨을 알려줍니다. 근심이나 스트레스를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22절이 위치한 단락(21-25절)의 주제(미련한 자들의 삶)에 비추어 잠언은 전단은 지혜로운 자, 후단은 미련한 자의 삶를 지칭합니다. 21절이 말하듯이, 미련한 자(‘케실’과 ‘나발’)는 영적, 지적, 혹은 도적적으로 어리석게 처리하는 자들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실질적 무신론자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얻어지는 마음의 즐거움이 얼마나 크며, 다른 어떤 것보다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바보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삶, 물질적인 것, 탐욕스러운 것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성공이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자는 주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주권 안에서 안식하나, 미련한 자는 자기가 안고 온갖 근심 걱정 분노에 시달립니다. 이른바 뼈가 마르는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을 당할 때, 마음을 굳게 하고 주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던져버리십시요. 이는 그분이 여러분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벧전5:7,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