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92: 5절
“주님, 주님께서 하신 일이 어찌 이렇게도 큽니까? 주님의 생각이 어찌 이다지도 깊습니까?”(새번역)
‘안식일의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적절합니다. 안식일은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께 의존해 사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재능이 있고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 힘껏 일한 뒤,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그 결과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권자이신 주님께 예배드리며 안식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구분하라는 제4계명이 주는 의미 중 하나입니다. 주의할 점은, 진정한 안식을 가져온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일요일)이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주간의 첫 날인 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행20:7).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 안에서 안식할 줄 아는 신자들은 복이 있습니다(마11:28).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의 구조입니다.
I. 지존자를 찬양 (1–3)
II. 감사의 노래 ( 4–14)
A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 4–5)
B 심판과 존귀 (주님)(6–8)
B′ 심판과 존귀(시인) ( 9–11)
A′ 의인의 번영 (12–14)
III. 주님을 찬양 (15)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보다 크고, 깊으시며(5), 심판은 아주 공의로우시기에 악인은 멸망당하고, 의인은 높이들릴 것입니다(7-11). 따라서, 요동치는 삶의 현장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신자야말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편92:12).
시편92: 12절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새번역)
시인은 악인의 운명을 목격하였습니다. 11절입니다: “나를 엿보던 자들이 멸망하는 것을 내가 눈으로 똑똑히 보며, 나를 거슬러서 일어서는 자들이 넘어지는 소리를 이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새번역). 그리고 의인의 삶을 생각하자(12), 시편1편의 고백이 흘러나왔습니다. 92편과 1편 모두, 의인의 삶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다만, 1편에서 의인은 시냇가에 심겨서 때를 따라 열매를 맺고 늘 푸르른 잎을 가진 나무였지만, 92편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심긴 종려나무와 백향목,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른 거목입니다. 1편은 의인의 일상을, 92편은 성전 예배를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보호와 축복 가운데 살면서, 아름답게 노년을 맞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늙어도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에 차며,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누구나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노후가 영광스러운 진정한 이유는 그가 보다 뜻깊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살아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노년을 보는 자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얼마나 당신의 말씀에 정직하시고, 우리가 의지할 바위가 되시는지 그의 삶 자체가 선포합니다(15). 실로 의인의 삶은 주님의 의를 드러내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인생의 최종평가는 우리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가 드러낸 주님의 영광으로 측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1:21, 새번역).
잠언 17:16절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새번역)
16절 이하 20절까지 5개의 구절은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들(친구)과 분쟁을 좋아하고 사람을 싫어하는 바보를 대비시키며 “무엇을 사랑하는가?”의 관점에서 교훈을 줍니다. 16절은 ‘왜’ 혹은 ‘어째서’의 뜻을 갖는 히브리어 ‘람마’로 시작되는 수사의문문의 형태입니다. 솔로몬은 기괴한 그림을 제시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손에 돈을 들고 현자에게로 가서, 지혜를 사고자 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왜’에 대한 답은 불필요합니다. 현자는 무척 화를 낼 것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바보란 자신을 위해서라면, 도덕적 질서를 무시하고, 현자의 바른 질책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완고하며 제멋대로 살아가는 바보가 돈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고 온다면, 현자가 질색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명기에는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주님이 미워하기 때문에, 절대로 받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신23:18). 지혜나 참된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실로, 지혜는 돈을 지불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들음, 신중함, 겸손 등 바른 인격의 축적을 통해서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과목은 만유의 주님을 경외하는 법 배우기입니다(1:8). 자기중심적인 바보는 보이는 이웃도 사랑할 줄 모르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그는 배울 마음이 없기 때문에, 타인은 물론 친구나 혈육의 가치, 그리고 필요성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아이들도 알고 있지만, 바보는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습니까?(15:32).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 (잠언17:17, 새번역).
잠언 17:17절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새번역)
이 잠언은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인 친구와 형제의 가치를 교훈합니다. 친구와 형제는 늘 필요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찾아오는 고난의 시기를 감안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악인들은 지극히 이기적이어서 그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고난에 처한 친구나 혈육을 돌보지 않습니다. 친구는 좋은 시절이건 아니건 언제나 사랑하며 위해주는 관계입니다. 고난의 시기는 참된 친구를 분별하도록 합니다. 역경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의 유배 생활 중 역관 이상적의 사람됨을 알게 되었고, 세한도를 그려 주었습니다 (1844년). 한편, 본 잠언은 형제는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운명지워졌다고 말합니다. 친구와 형제의 차이를 구분한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대체로 고난의 시기에는 친구들은 떠나고(19:4), 혈육을 나눈 형제만이 도움을 주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친구가 역경에 처할 때나, 형제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을 경우, 적극적으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힘든데, 어느 정도까지 도와 주어야 할까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3년 정도의 적금을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대표적 사례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지혜롭게 접근하였습니다. 20년 전 형제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이들의 변화를 확인할 팰요가 있었습니다. 여러 번 테스트 후 변화를 확인한 요셉은 전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서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구나 형제가 곤궁해도 남의 보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처할 지혜가 부족하면 주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약1:5).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17:18).
잠언17:18절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현대인의성경)
40년 전만 하여도 신원보증서를 제출하여야 입사가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역시 신원보증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수 년이 흘렀습니다. 문제가 될 경우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분은 신원보증을 한 친지에게 손해 배상이 청구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늘 근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사라지고, ‘보증’이 사업의 한 부문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개인 간의 보증의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보증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였습니다. 17절이 선한 이웃(친구/형제)을 다룬다면, 18절은 어리석은 이웃(친구)의 특징을 언급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빚 때문에 매우 곤란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어리석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자신을 모르고 정에 못이겨 선뜻 보증이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생각 없이 쉽게 타인의 빚에 보증을 서는 사람은 지혜 없는 자라는 잠언의 말씀은 주의해야 합니다. 한편, 17절에는 역경에 처한 친구를 돌보라고 하고, 18절에는 보증 서지 말라고 합니다. 조화가 필요합니다. 역경에 처한 친구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지만, 아무런 계산 없이 채무, 특히 고리로 차입한 빚의 보증을 서지는 말라는 훈계입니다. 타인의 빚에 대한 보증을 섰다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묘사한 잠언6:1-5은 특히 청년들에게 아주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리석은 이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싸우기를 좋아 하는 이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죄를 사랑하는 자이며 부를 자랑하듯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이다.”(잠언17:19, 현대인의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