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5/01 – 06)

시편91: 2절
“나는 주님께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다”(새번역)

시인은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할 때, 실로 많은 위험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위험은 숨어서 기다리며(3), 때로는 음험하게 다가오기도 하며(3,6), 위험이 예상되어 두려워 하게도 됩니다. 더구나 위험의 연속일 때도 있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피난처, 그것도 절대적인 피난처를 갈망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확실한 피난처임을 발견하고, 자신의 피난처로 삼았음을 거듭거듭 말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 시의 주제 – 확실한 보호
     B1 (2) 개인적 증언
         C1 (3–8) 시인의 확신
    B2 (9a) 개인적 증언
         C2 (9b–13) 시인의 확신
  A2 (14–16) 확증된 주제: 하나님의 보호

시를 읽어내려가면, 하나님을 우리의 요새요, 피난처로 삼았을 때 늘 안전하다는 시인의 확신에 저절로 동의하게 됩니다(9,10). 시의 저자는 알지못하나, 전쟁을 누비는 다윗이 떠오릅니다. 다윗 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또 경험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90편, 91편, 92편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90편에서 모세는 주님의 축복과 은혜를 호소합니다. 91편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진술합니다. 그리고 92편에서, 경건한 시인은 찬양을 드립니다. 신약의 두 곳에서 본 시편을 인용합니다. 하나는 마귀가, 또 하나는 주님입니다. 내일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그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내가 그를 건져 주고, 그를 영화롭게 하겠다.”(15절, 새번역)

시편91: 11,12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1,12절에서, 주님은 보이지 않는 천사들을 명령하사 시편 기자를 지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피난처와 반석으로 삼은 시편 기자에게 주신 약속들의 절정입니다. 천사들은 구원 얻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 받은 영적 존재입니다(히1:14). 더 이상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와 같은 구원 얻을 상속자들은 겨우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사자나 독사와 같은 무서운 원수들을 짓밟는 정복자들입니다(13). 정복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마귀는 이와 반대입니다. 광야에서 금식하시는 주님을 마귀가 찾아왔습니다. 마귀는 주님을 성전 꼭대기에 놓고 거기서 뛰어내리라고 말하면서, 본문 11,12절을 안전에 대한 근거로 인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요청이었습니다(마4:6,7).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읽는 방식은 마귀의 특질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를 써보지만 너무나도 힘이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40일 금식 후로 지쳤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의 주님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천사의 도움을 보내셨습니다(마4:11; 눅22:43). 요청도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특질입니다 (마26:53,54).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신약에서 인용된 또 하나는 13절입니다. 내일 보내드리겠습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시편91:13절)

시편91: 13절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사자와 독사’는 각기 힘과 교활함을 상징하며, 빈번하게 악한 사람이나 능력들의 존재를 표현합니다. 13절은  양자를 함께 등장시켜 ‘그 악한 존재들이 어떤 모습으로 오든지 간에’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 대한 구체적 성취는 본 시편이 아니라, 신약 성서에 나타납니다. 신약에서 악한 존재는 사람 보다는 마귀나 귀신 등 영적인 존재를 지칭합니다. 좋은 예는  70 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주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한 사건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면서 주님께 보고하였습니다. 보고를 들은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10: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시편 91:13절에서 하신 약속을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능력의 근원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욥의 사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능력이나 존재도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신자들은 이 진리를 잘 알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며, 늘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물론, 어디까지 구원하시는지 알려고 주님을 시험하는 따위는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승리를 경험한 뒤 빠지기 쉬운 교만 역시 주의해야 합니다. 이때문에, 주님은 승리를 기뻐하는 70 명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고 교훈하셨습니다. “정녕, 주님은 너를, 사냥꾼의 덫에서 빼내 주시고, 죽을 병에서 너를 건져 주실 것이다.” (시편91:3,새번역)

잠언 17:14절
“다툼의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것과 같으니, 싸움은 일어나기 전에 그만두어라.”(새번역)

14절은 12절에서 경고한 성난 바보를 만났을 때, 그의 억눌린 오만과 분노를 자극하면 싸움(소송)이 일어나니 주의하라고 권고합니다. 분노를 품은 어리석은 자와 다툼이 한 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마치 둑이 터지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싸움의 시작을 둑(땜)에서 물이 새어나오는 은유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둑이 터지는 과정은 물이 새어나오면서 시작됩니다. 물은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이윽고 둑이 터지게 되면 그 손해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은 한 번 시작 되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싸움은 일어나기 전에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만 두다’의 원어의 뜻은 “단념하다”입니다. 만약 다툼이 조금이라도 시작된다면, 부드러운 대답으로 분노를 쉬게 하는 등  화목으로 가는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좋은 영향을 주어서 상호 간의 손해를 극소화하는 것은 물론, 평정을 되찾게 되어, 이성적인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다윗이 바로 이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선을 악으로 되갚은 자들 앞에서 마치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현명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 대신 다윗은 기도하면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시편38:12-20). 이와 대조적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사람은 말썽꾸러기(6:12~19), 비뚤어짐(16:28), 성냄(15:28), 분노(29:22), 오만(28:25), 증오(10:12)와 같은 행태를 보이게 됩니다. 우리 모두 피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 (잠언16:32,새번역).

잠언 17:15절
“악인을 의롭다고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주님께서 싫어하신다.”(새번역)

15절은 10절부터 시작된 “어리석은 자와 벌”이라는 주제를 끝맺음하며, ‘바보와의 싸움을 그치라’는14절의 교훈에 균형 추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정의의 확보입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악인을 의롭다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 할 정도로 정의에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율법은 시비를 맡은 재판장에게 “의인은 의롭다하고 악인은 정죄하라”(신25:1)고 요구합니다. 만약 이 규정과 반대로 판결한다면, 큰 재판장이신 주님의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싫어하신다”의 원어 “ 토에바”는 구역질나는 것, 혐오, 우상과 같이 가증한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토해 내치고 싶을 정도의 역겨워하고 극도로 혐오스러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불의한 판결을 내리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가증한 우상과 같이 파멸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를 알면서도 그릇되이 판결한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대 근동에서 타락한 재판관들은 죄 있는 자를 무죄방면하고, 죄 없는 자는 아예 재판정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경우가 상당히 빈번하였습니다. 속담에 한 명의 무죄한 사람을 정죄하는 것보다, 10명의 죄인을 놓아 주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잠언은 이와 관련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있습니다. 판결은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사(악한 천사임)들을 판단할 것입니다(고전6:3). 당연히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지혜 중 하나는 사랑은 정의(=하나님 사랑)의 실천이 우선임을 아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잠언 17:16,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