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9: 49절
“주님, 주님의 신실하심을 두고, 다윗과 더불어 맹세하신 그 첫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새번역)
이 탄원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14절) 인자와 진실의 하나님/ (15-37절) 그분의 신실하신 약속들/ (38-51절) 약속과 다른 현실 그리고 기도입니다. 서두부터 시인은 인자와 진실이 많은 주님이심을 노래합니다(1-14). 이어 시인은 주님의 약속 즉, 다윗의 뒤를 이어 왕 위에 오를 후손이 영원히 끊이지 않는다는 약속을 기억합니다 (15-37).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다윗의 왕가는 멸망당하였고, 심지어 자신들은 가나안 땅에서 뽑혀 멀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영 숨어 계시렵니까?”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시인은 외칩니다. 비시586년 베벨론에 멸망당한 후, 이스라엘 상황이 그러하였습니다. 바벨론이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후, 다윗 가문에서 결코 통치자인 왕은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탄식하며 심한 좌절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합니다. 약 550년 후,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롬1:3).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기를 열망하는 시인에게, 그리고 죽음 앞에서 무력함을 고백한 시인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무나도 확실한 응답을 주셨습니다(48절).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죄와 사망과 싸워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깨진 것처럼 보일 때, 시인처럼 우리도 약속을 주님 앞에 노래하고, 현실의 실망을 기도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고후1:20, 새번역)
시편90: 12절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새번역)
시편 제1권(1-41)은 개인적 차원을, 제2권과 제3권(42-89)는 국가적인 차원을, 그리고 제4권과 제5권(90-150)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의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4권은 총17편(90-106)으로 대부분 익명입니다. 과거에 이 시(모세의 기도)는 고린도전서15장과 함께 장례식에서 늘 낭독되었습니다. 그때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시는 4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2)영원하신 하나님/(3-6)덧없는 인생/(7-12)진노 하의 인생/(13-17)은혜의 하나님. 배경은 40년 동안의 광야를 방황하던 시기로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권능으로 애굽에 구출되어, 시내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1년 동안 머무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율법을 받았습니다. 또 성막과 각종 제사제도를 완비하였고, 하나님은 그들 중에 거하셨습니다. 그후, 광야를 가로질러 가데스바네아에 이르자, 정탐 12명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40일 후 그들로부터 장대한 가나안 족속에 대한 보고를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두려워 하여 밤새 통곡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버렸습니다. 주님 역시 그들을 버렸습니다(민14:34). 38년 동안 60만명의 장정이 죽었습니다. 모세도 이 세대와 함께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엄정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의 테스트를 거칩니다. 주님은 성적을 매기십니다. 저조한 성적표를 받아든 후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하게 됩니다. 3번 부인한 베드로와 같이 말입니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시편90:13,새번역).
잠언 17:11절
“반역만을 꾀하는 악한 사람은 마침내 잔인한 사신의 방문을 받는다.”(새번역)
본 구절은 배신을 잘한다는 악한 사람의 특성과, 그들에게 임할 엄중한 벌을 경고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아무리 가혹한 형벌을 받아도 교정받지 못합니다(10a). 더 나아가 이들은 하나님이나 통치자에 대하여 반역을 꾀하고자 하는 마음까지 이르게 됩니다(11a). 당연히 잔인한 사자(messenger)가 보내지고, 결국 그들의 운명은 죽음으로 귀결될 것입니다(11b). 잠언은 고집불통의 어리석은 자를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악인과 동일시합니다. 한편, 잠언에서 왕은 하나님의 통지 대리자입니다. 따라서 왕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왕은 멸망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 왕이 그 전형입니다. 그는 사무엘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보다는 백성을 더 두려웠습니다. 주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영광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순종을 시험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말렉과 그들의 소유를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울은 아말렉 족속은 멸망시켰으나, 짐승의 떼 중 좋은 것들은 살려두어 자신과 백성의 소유물로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가서,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삼상15:23)고 책망한 뒤, 그의 불순종 때문에 주님께 버림받았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불순종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돌이키지 않고 계속 불순종하다가, 말년에 블레셋 군대에 의하여 세 아들과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1:5,6).
잠언 17:12절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라.”(새번역)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이란, 미련한 일 행하기를 극도로 힘쓰는 바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미련한 사람이란 단순히 지혜가 부족하여 어리석게 행동하는 자가 아닙니다. 잔인한 폭력성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이 새끼 빼앗긴 암곰을 비교 대상으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요점은 명백합니다. 곰은 위험한 동물이지만, 새끼 빼앗긴 암곰은 특히 더 위험합니다. 그러나 난폭하고 맹렬한 암곰과 직면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바보가 내리는 결정들은 어리석어 커다란 해를 가져오기에 마땅히 피해야 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과장섞인 유모를 사용하여 미련한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왕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최고의 군대장관이자 사위인 다윗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희대의 명장인 다윗을 쫓아낸 사울 왕은 원수 블레셋 군대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또한, 선지자 예레미야를 생매장하려 했던 고관들(렘18:20), 메시야를 제거하기 위해 유아 학살도 불사한 헤롯 대왕(마2:16), 왕이 되려고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압살롬 등이 떠오릅니다. 이들은 미련할 뿐만 아니라 분별 없는 분노를 품고, 짐승보다 더욱 포악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입니다. 중국 고사입니다. 범려는 왕 구천을 도와 월나라가 패권을 잡게 한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그는 대업을 달성하여 득의양양한 구천을 보고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은거하였습니다. 성공한 왕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악으로 선을 갚으면, 그의 집에서 재앙이 떠나지 않는다”(잠언17:13,새번역).
잠언 17:13절
“악으로 선을 갚으면, 그의 집에서 재앙이 떠나지 않는다.”(새번역)
11절에 언급된 반역을 일삼는 바보는 이윽고 ‘악으로 선을 갚는’ 배은망덕한 행위로 나아가게 됩니다( 13a). 반역만 꾀하는 바보에게는 잔인한 죽음의 사자가 보내졌지만(11a), 배은망덕한 바보의 집에는 재앙이라는 악한 손님이 찾아와 떠나지 않습니다(13b). ‘악으로 선을 갚는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러나 배은망덕은 인류의 보편적 성품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선물을 차 버리곤 합니다. 창조주의 과수원인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먹고난 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 내가 주인이야!”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주인처럼 행동하여 환경을 파괴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힙니다. 인간의 그런 무지한 행동 때문에, 인간에게 재앙은 떠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 실천해야 합니다.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인간의 길이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벗어난 다윗은 충성스러운 헷 사람 우리야까지 죽였습니다. 주님은 악한 손님을 보내셨고, 그 재앙은 다윗 가문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근친상간, 살인, 반역적 행동을 일으켰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주님께 십자가의 선고를 내리고 자신은 죄가 없다면서 손을 씻었을 때, 유대인들은 외쳤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마27:25).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행한 모든 선한 일을 무시하고 악으로 갚았습니다. 재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져서 2천년 동안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야만 합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마3:8,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