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4/18 – 22)

시편87: 4절
“내가 라합과 바빌로니아를 나를 아는 나라로 기록하겠다. 블레셋과 두로와 에티오피아도 시온에서 태어났다고 하겠다.”(새번역)

총 7절이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을  증거하는 시입니다. 주제는 ‘도성’, ‘탄생’, ‘책’의 세 가지입니다. 1-3절은 ‘시온’이라는 하나님의 도성을, 4-5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생’을, 마지막으로 6절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명부(책)’입니다(6). 본질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이스라엘의 장자권이 적대적인 이방 국가들(4)로 확장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습니다(계20:12). 이 시는 주님께서 생명책에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6; 눅10:20). 하나님의 도성에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속의 길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거기에 대로가 있어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35:8)라고 노래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 주님의 터→ B1 (2) 주님의 사랑→ C1 (3) 하나님의 도성→ D (4) 우주적 도성→ C2 (5) 지존자의 도성→ B2 (6) 주님의 명부→ A2 (7) 나의 터들. 로마 백부장은 병든 종을 고치러 오시는 주님께 “들어 오시지 말고, 말씀만 하사 낫게 하십시요’라는 말을 합니다. 그의 믿음에 놀라신 주님은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마8:11,새번역)고 하셨습니다. 본 시편의 성취를 말하신 것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7)

시편88: 3
“아, 나는 고난에 휩싸이고, 내 목숨은 스올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새번역).


시인은 닥쳐온 심한 고난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시는 세 단락(1-9a, 9b-12, 13-18)으로 나누어집니다. 각 단락은 간절한 인내의 기도(2,9,13절), 흑암의 경험(6,12,18절),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 두려움(5,10,15절)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정말 기도에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설명도 받지 못하고 고난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들, 멀어진 친구들, 병약한 몸, 그리고 자신을 보아도 공포만 보이고(16), 장래를 바라보아도 어두움은 줄어들지 않습니다(18절). 우리 역시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흑암의 시기를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 복음과 확신, 하늘과 보상 등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인과 같이 우리들은 신음하는 창조물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롬8:13-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기도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고난을 허락하신 주님께 대한 경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만유를 주관하시는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13,14). 인생이 늘 고난으로 점철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고난은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분의 주권을 베게 삼아 안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잠언17:8절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잠언 8절은 뇌물에 대한 경고입니다. ‘뇌물’의 히브리어는 ‘쏘하드’이며, 선물을 뜻하나, 결코 좋은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로운 판결이나 공정한 집행에 나쁜 영향을 미치려는 문맥에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뇌물로 번역한 것입니다. 뇌물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강도짓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미가3:11). 그러나 뇌물은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요술방망이처럼 보인다’로 번역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원어는 ‘에벤-헨’으로 단 한 번만 구약에 등장합니다. ‘헨’은 ‘호의’ 혹은 ‘매력’을, ‘에벤’은 ‘돌’을 의미합니다. 이는 ‘매력 혹은 호의를 만들어 내는 돌’을 뜻합니다. 실로 마법의 돌입니다. 뇌물은 마법처럼 사람의 판단력을 둔화시킵니다. 공의는 굽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도 재판장이 되었을 때 뇌물의 매력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AD60년 경 유대 로마 총독 펠릭스는 뇌물을 받고자 연금된 바울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뇌물 대신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는 두려워 하였지만, 바울로부터 뇌물을 받고자 하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자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자, 병든 자, 눈먼 자 등을 초청하여야 합니다(눅14:12-14). 왜냐하면 그들은 뇌물은 물론 그 대접조차 결코 되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숨겨져 있던 우리의 의를 주께서 모든 자들에게 드러낼 때 칭찬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11).

잠언17:9절
“허물을 덮어 주면 사랑을 받고, 허물을 거듭 말하면 친구를 갈라놓는다.”(새번역)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가 나를 화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모욕에 가까운 행동을 하였을 때, 신자는 현명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본 잠언의 교훈 방식은 관용적인 태도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비교하는 대구법을 사용합니다. 먼저 관용적인 태도입니다. 허물을 덮어준다는 것은 잘못을 용인하거나 못본 체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잘못을 들추어내지 않고 마음으로 긍휼히 여겨 용서주는 것입니다. ‘덮다’의 원어는 ‘메캇쎄’으로서 ‘가리다, 숨기다’의 뜻입니다. 남의 잘못을 실제적으로 용서하고 아예 잊어버림을 말합니다. 관용적인 태도는 사랑을 싹트게 합니다. 하반절은 험담이 사람 사이를 갈라 놓는 도구가 됨을 언급합니다.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험담을 여러 번 들으면, 마음이 식어지게 됩니다. 이웃관계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혜자는 남의 험담을 포함하여 복수를 꾀하지 않습니다. 복수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수를 금지하는 명령도 그는 숙지하고 있습니다(신32:35). 하나님께서 만민의 재판장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잘못을 다루실 권한과 책임을 다 가지셨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분이 계신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참고 사항이요 고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수를 꾀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원자의 세계를 실험과 방정식으로 검증하여 아는 물리학자처럼 신자는 성경의 말씀을 믿고, 내세의 능력을 경험하며, 기쁨과 두려움으로 보석과 같이 말씀을 간직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17:10절
“미련한 사람을 백 번 매질하는 것보다 슬기로운 사람을 한 번 징계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 (새번역)

미련한 자는 완고하여 고치지 않습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바른 교훈을 잘 받아들입니다.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이 둘을 대비합니다. ‘슬기로운 사람’의 히브리어는 ‘베메빈’입니다. 빈(discerning)은 ‘분별’을 뜻합니다. 단지 두뇌의 명석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바른 판단력을 갖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 민첩하게 수행합니다. ‘미련한 사람’의 원어는 ‘케씰’입니다. ‘케씰’은  ‘살진, 어리석은, 바보스러운’ 등을 의미합니다. 미련한 자는 단지 지능이 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판단력이나 의지, 행동 면에서 슬기로운 사람과 현저한 대조를 보입니다. 한편 ‘백 번 매질’은 과장법입니다. 율법에는 40대 이상의 매를 금하기 때문입니다(신25:2,3). 지금, 솔로몬은 아무리 가혹한 형벌을 내릴지라도 미련한 자를 교정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거지 나사로를 무시하고 살다 죽은 부자와 그의 형제들이 좋은 예입니다. 죽어 멀리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어 아직 살아 있는 형제들에게 회개하도록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지혜의 첫걸음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할 수 있는냐에 귀착이 됩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할 수 있냐의 여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사람, 특히 어른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야 합니다.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라.” (잠언17:12,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