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86:8
“주님, 신들 가운데 주님과 같은 신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어느 신이 하겠습니까?” (새번역)
이 시에서 주님은 35 번 언급되어,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잘 보여줍니다. 가난과 궁핍으로 도움이 절실 할 때(1), 환난의 날에(7), 그리고 오만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이 대적할 때(14), 주님이야말로 다윗 자신이 머리를 놓을 수 있는 베개입니다. 주님은 그가 부르짖는 기도를 듣고(3-4) 구출하여(12-13) 원수들을 수치스럽게 하실(17)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난을 당할 때 능력으로 구원하여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8). 시를 좀 더 깊이 성찰해 보면, 다윗의 기도는 다윗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말하기 보다,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께 말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초점은 주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방식으로 (느헤9:5~31, 32~37), 우리 기도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 보다 믿음을 유지시키고 굳건하게 하는 방식은 없습니다. 주님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요1:1-3). 바닷속 물고기나, 공중의 새도 그분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경외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쳐 온 고난은 무엇이든지 주님의 허락을 받고 닥친 것입니다. 죄가 있다면 고백하고 구원이 올 때까지 믿음으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에 허락하신 것을 믿고 말입니다. 이것이 좀 어렵습니다만(히5:11-14), 이 시기야말로 주님께 우리의 신실함을 보여 줄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시편86:11,새번역)
시편86:10절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기도의 자세에 관한 이 시의 3가지 교훈입니다. 먼저는 (1) 우리의 신분입니다: 주님 앞에서 다윗은 자신의 신분을 자각합니다. 그는 전하, 폐하로 불리는 왕이나, 주님 앞에서는 그저 ‘주의 종’이고 ‘주의 여종의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16). 아무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다윗이나, 늘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노예)’로 자칭한 사도 바울이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2 )우리의 현실입니다.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시편에서 ‘가난한 사람’은 ‘억압받는 사람’과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고난이 올 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 태도는 교만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온갖 경건치 못한 행태와 절망으로 가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이에 반하여, 신자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난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만 못해서가 아닙니다. 주인이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근거입니다. 다윗처럼 신자는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 속에 늘 기뻐합니다. 결국은 영생입니다. (3) 우리의 소망의 근거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증거합니다. 사무엘서는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과 주님의 도우심, 그리고 왕의 권력을 남용할 때 주어진 심판이 아주 잘 기록하였습니다. 구원의 소망을 가지는 신자들이 주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편86:15).
잠언 17:5절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가난의 이유는 복합적이나, 주로 개인의 귀책사유(게으름 등)로 돌리게 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불의한 사회구조 등)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잠언도 같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10:4) 전자의 경우이며, “가난한 사람이 경작한 밭에서는 많은 소출이 날 수도 있으나, 불의가 판을 치면 그에게 돌아갈 몫이 없다.”(13:23,새번역)는 후자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난이 그들을 비난할 수 없는 사회적 요소가 더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급격한 기술혁명으로 산업구조가 매우 빠르게 전환되고 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회구조 때문에 가난하게 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국가의 재정정책과 재교육정책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본 잠언은 더 중요한 차원을 언급합니다. 가난한 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그를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조롱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인격 모독은 이래서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비판이 정당한 한계를 넘어갔을 때 단순히 인간에게 미치는 문제 뿐만 아니라,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영향을 받습니다. 모독이 아닌 비판 역시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삼가해야만 합니다. 가난 뿐만 아니라 재앙을 당한 사람이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는 안타까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그 모든 자를 지으신 주님을 불쾌하게 만들 것입니다.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자가 진짜 지혜자입니다.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13:9).
잠언17:6절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본 잠언은 16:31절,“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을 가족의 측면에서 반복하면서, 백발이라는 영화로운 면류관에 이르는 공의로운 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가족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 단위입니다. 본 잠언은 가족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 관찰에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가문의 수치가 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행동할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사회라도 한 가족 구성원의 행동은 당연히 다른 가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영광이든 수치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손자, 손녀를 두었다는 것은 어쨌건 오래 살았고, 다산의 축복을 받았으며, 경건한 삶이 보답(면류관)되었음을 증거합니다. 한편, ‘부모는 자식의 반팔자다’ 는 말도 있듯이, 부모는 자녀의 영광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경건한 부모의 경우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이 바른 삶을 살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자녀들이 늙었을 때 역시 백발이라는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교훈하고 모범을 보여준 부모는 자식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으로 부모가 자식의 수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녀들이 주님을 경외하도록 배우지 못하였을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의 한 사형수의 고백입니다. 어릴 때 이웃집의 물건을 훔쳐다 어머니를 가져다 주면 아무 말도 안하고 요리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점점 더 큰 범죄에 빠졌는데, 만약 그때 어머니께서 따끔하게 야단을 치셨다면 자신이 이런 자리에 앉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후회하였습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잠언16:17,새번역).
잠언17:7절
“거만한 말이 미련한 사람에게는 안 어울린다. 하물며 거짓말이 통치자에게 어울리겠느냐?”(새번역)
17:7-28절은 바보들의 종합세트입니다. 솔로몬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분별력을 가져 어리석지 말고, 그들이 야기하는 분노를 다스려라! 4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7-9절) 도입부(거짓말, 뇌물, 험담)/ (10-15절) 바보들에 대한 벌/(16-20절) 바보와 친구/(21-28절) 바보들과 지혜자. 본 구절(7)은 두 개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다룹니다. 먼저, 미련한 자가 하는 ‘거만한 말’(원어-예더)입니다. ‘예더’는 ‘웅변’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이 자신을 높이고 남을 폄하하는 거만한 말은 듣기에 거북합니다. 그런 바보가 가르친다고 웅변하는 모습은 더욱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존귀한 자 혹은 통치자로 묘사된 지혜자에게 거짓말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친히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 생축처럼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신 분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표적을 요청 받으시자,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29-30) 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에서 토해져 니느웨 백성들에게 나타나 복음을 선포한 것과 같이, 부활하시어 사도들과 오백여 형제들 앞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이것이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복음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눅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