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3/28 – 04/01)

시편84:10절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새번역)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노래입니다. 고라 자손은 레위 지파로서 성전과 제사 업무를 맡았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직무에 너무나도 만족하여, 성전의 하루가 다른 날보다 1천배 값지다고 고백합니다. 직업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을 섬기면서 거듭거듭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살펴보니 동료들도 같은 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4). 이 시는 ‘복이 있다’는 구절이 3번 등장합니다: (1-4절) 주님을 갈망하여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이 받는 축복/ (5-8절)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시온의 대로를 따라 순례의 길에 오른 자들이 받는 축복/(9-12절) 주님을 신뢰하여 그분 안에서 쉬는 자들의 축복입니다. 신앙의 길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인 갈망이 없이는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런 갈망 때문에 영원한 순례의 길에 접어들지만, 그 순례의 길은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목적지인 하나님 앞에 이르기 불가능합니다. 당연히 순례의 길은 ‘눈물골짜기’로 번역된 ‘바카 골짜기’를 거치게 되는데, 그곳은 물이 없어 매우 메마른 곳입니다. 어려움이 이만 저만 아닙니다. 그러나 순례자는 주님께서 샘을 준비해 놓으실 것을 믿고 나아가며 기도합니다(6). 그 결과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마침내 각자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은총을 받습니다(7). 시인은 돌보시고, 방패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늘 신뢰하면서 정직하게 살아갑니다(11). 결국 시인은 축복 받아 주님 안에 안식하게 됩니다(12). 시인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43).

시편85:7절
“주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주님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새번역)

인생에서 맞닥드리는 고난이 항상 하나님의 징벌이나 진노의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언제나 혹시라도 고백되지 않은 죄나, 바로 잡지 못한 잘못의 여부를 스스로 성찰하여야만 합니다.  이 시편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시의 흐름입니다: 기억(1-3), 간구(4-7), 경청(8), 소망(9-13).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단지 기억 속에만 있을 정도로 아련한 과거였습니다(1-3). 현재의 삶은 그분의 진노로 충만하였습니다(4-7).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시인은 고난으로 가득찬 현실을 보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고뇌 하던 선지자 하박국은 악한 바벨론 때문에 격는 불의한 상황을 불평하며, 하나님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합2:1). 시인 역시 같습니다(8).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하여 영적, 도덕적, 물질적인 조화가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미래를 소망하고 있습니다(9-13). 성경에서는 고난이 오면 소망도 함께 주어져 인내하게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야의 약속을 주셔서 소망의 인내를 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낯선 가나안 땅에서 200년을 이방인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를 소망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가운데 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경험함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소망의 인내를 하십시요. 그분의 아들을 보내주신 그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잠언17:2절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일을 하는 주인집 아들을 다스리고, 그 집 자녀들과 함께 유산을 나누어 받는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16:32b)와 짝을 이루는 이 잠언은 슬기로운 종이 수치스러운 아들을 다스리는 경우를 언급하여, 가족의 리더쉽은 타고난 혈통보다는 성품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수치스러운 아들은 추수 때에 잠을 자는 아들입니다(10:5). 어리석습니다. 추수 때 부지런히 거두는 것은, 농경 사회에서 슬기로운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만약 주인집 아들이 게으르고 집을 관리할 줄 모른다면, 그는 슬기로운 종의 지시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종은 그 집의 보배와 같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돌아가는 유산을 함께 나누어 받는 지위까지 갖게됩니다. 이는 그 당시 법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갖지못하고 자신의 미래에 아무런 소망도 없는 종이, 법과 관습을 넘어 그의 미덕 때문에 성공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역사에는 이런 사람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자면,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 의하여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팔렸지만, 근면과 지혜, 그리고 주님의 섭리로 가정총무가 됩니다. 주인의 모든 재산을 다스렸습니다. 그 출세의 순간에 유혹이 왔으나 뿌리칩니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힙니다. 이때 역시 근면과 지혜 그리고 주님의 돌보심으로 감옥의 모든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수년 후,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신 지혜에 의하여 애굽의 총리로 발탁됩니다. 총리로서 아버지 가정은 물론 만 백성의 생명을 기근으로부터 건져냅니다. 주님의 돌보심을 믿고, 기도하면서 부지런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잠17:3,새번역).

잠언17:3절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hearts)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은 은과 금의 순도를 시험하는 도가니와 풀무의 두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가식을 벗기시고, 마음의 진실함과 순결함을 판단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람을 구분하시는 방법은 외모나 말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입니다. 도가니나 풀무는 테스트 뿐만 아니라, 순은과 정금을 만들어 내는 도구입니다. 주님 역시 시련의 과정을 통해 입증된 참된 인격을 갖추게 합니다. 우리는 평안한 삶을 원하지, 시련과 역경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 반면, 전지전능하신 주님은 온전한 신앙 인격을 갖춘 신자를 원하십니다. 테스트 없이는 온전한 인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테스트, 특히 도덕 테스트는 주님 입장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또 인간을 심판하시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친히 인간이 되셔서 모든 시험-도덕, 고통, 빈곤 등 -을 다 거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르게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순전하게 살아도  타인과 동일한 시련을 받는 것은, 제사장의 역할은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 기준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욥의 경우와 같이 천상의 존재들에게 자랑하시려는 것도 주님이 가지신 즐거움이십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시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 인내하시고,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십시요!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 보았느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욥2:3,새번역)

잠언17:4절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17:4,5절은 두 종류의 악인을 묘사합니다. 하나는 거짓말 하는 자로서(4), 그는 말로 공동체에 불행을 초래합니다. 또 한 명은 가난한 자를 조롱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입니다(5). 전능하신 주님은 이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인 백발은 이들을 피할 것입니다. 특히 4절은 사악한 말을 듣는 자는 바로 악인이고,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 사람이 바로 거짓말쟁이라는 놀라운 진실을 전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자명한 이치입니다. 혀와 입술 그리고 귀는 모두 한 인격에 속한 기능들입니다. 인격이 거짓되고 악한 데 어떻게 이 기관들이 다르게 사용되겠습니까? 거짓말하는 자와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자는 모두, 진실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습니다. “악한 말은 환영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어 없어지나, 환영하게 되면 우리가 사라진다”는 경구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명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38년 된 병자를 이적으로 고치시자, 둘러싼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가 나를 영접지 아니하나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AD70년 로마에게 크게 패배한 바 있었습니다. 그 후 60년이 흘러 바르코흐바가 나타나 유대인들을 선동하자 그를 메시야로 따랐고, 이어 로마와 전쟁하다 민족은 전멸당하고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