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77: 13절
“하나님,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새번역)
본 시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맞아 불안과 근심에 싸인 시인의 고백입니다. 고난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기도조차 위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시인은 지치고 힘들어 합니다(1-3). 밤에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4). 이렇게 잠못 이루는 밤들을 지새우며, 시인은 과거에 좋았던 세월을 생각하게 되나(5-6), 그 때문에 현실은 더욱 괴롭습니다. 상황은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여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7-9).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인에게 새로운 빛이 떠올랐습니다(10). 그것은 과거에 행하신 주님의 기적들과 그분의 거룩하신 행적들, 위대한 역사, 인자하심에 대한 기억들입니다(11-13). 주님은 지난 날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을 인도하여 내실 때 홍해를 가르심으로 큰 능력과 위엄을 민족들 가운데 알리신 분입니다(14). 더구나 주님은 자신을 주의 백성들과 동일시 하시면서 ‘속량’(고엘-친족 구속자)하여 내셨습니다(15).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지만 자신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고난 속에서 많은 기사와 이적으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16-19). 그 주님은 ‘모세와 아론’과 같은 지도자를 세워 앞으로도 계속 인도하실 것입니다(20). 시인이 이렇게 회상한 위대한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하시려고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뒤 권능의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시인보다 훨씬 나은 믿음과 고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시편77: 2절
“내가 고난당할 때에,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밤새도록 두 손 치켜 들고 기도를 올리면서, 내 마음은 위로를 받기조차 마다하였습니다.”(새번역)
본 시편의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의 서두(1-4절)을 읽으면 시인은 고난으로 잠도 못자고 기도합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경이 멈추고, 상황이 호전되기를 위해 기도한 것은 확실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3). 즉,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위대한 변화를 만들어 내실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불리한 상황에 반응할 때, 신자는 하나님께 그 상황을 바꾸어 달라고 구하는 것보다,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붙잡아야만 합니다(10-20). 시편 기자는 부르짖고, 끈질기게 추구하며, 잠도 자지 않고 고민하고 기도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사실상 하나님이 주신 상황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짜증스런 거절과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대한 회상은 오히려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 대해 의문만 생겼습니다(7-9). 그런 의문들은 흔들리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며,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과거를 동경하는 것(6)은 현재를 위한 해결책도, 미래를 위한 처방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보지 않고(3), 이전의 영적 경험들에 집착하지도 않고(6), 오히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경이로운 행적과 거룩하신 인격, 권능과 섭리적 돌보심(19-20)을 신뢰하고 잠잠히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시77:20).
잠언16:20절
“말씀에 따라 조심하며 사는 사람은 일이 잘 되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새번역)
본문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새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전단은 인생 성공 비법으로 ‘말씀’ 즉, 지혜자의 가르침( 본 잠언의 교훈)에 주의하여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이런 교훈은 앞의 구절들(16-19)뿐만 아니라, 이어질 구절들( 21-24: 선한 말의 열매)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후단은 전단을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 된다’혹은 ‘행복하다’는 말씀 속에는 물질적 번영을 넘어 이웃 사이에서의 화평을 포함합니다. 지혜의 출발점은 주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두려워 하는 잠언의 제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세상적인 번영과 가치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실로 십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요 지혜자입니다. 잠언의 말씀을 무시하면 세상적 번영은 얻을 수도 있으나, 이웃 간에 화평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탐욕으로 인하여 어리석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주님을 경외하여 잠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공동체로부터 명철하다고 칭찬을 받습니다(21). 북이스라엘 왕국 초대 왕 여로보암은 종교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금송아지 예배를 창안합니다. 주님은 선지자를 보내사 기적까지 보여주면서 준열히 책망하였습니다만, 여로보암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가문은 몰락하였고, 그를 추종한 북이스라엘 열 지파 역시 심판받아 역사에서 아주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롬14:18,사역).
잠언16:21절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을 명철하다 한다. 말이 부드러우면, 더욱 많은 지혜를 가르친다.”(새번역)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가 마음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본 잠언 교훈합니다. 지혜자를 가진 공동체는 그를 ‘명철한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칭찬합니다. ‘명철’이란 히브리 원어는 ‘빈’으로 ‘분별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분별의 지혜가 있는 것은 물론, 인격이 갖추어져서 부드러운 말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공동체 내에서 그의 말은 더 잘 수용되고, 그의 지혜는 공동체에 선한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그가 공동체의 구성원들로부터 존경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온전히 갖춘 사람은 매우 보기 힘듭니다. 흔히 공자나 소크라테스 등을 지혜자로 예를 들으나, 이들 역시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자는 심지어 70세 즈음에 자신을 찾아 온 친구를 별 볼일 없다고 정갱이를 걷어 차서 쫓아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잠언은 오직 우리 주님의 삶 속에서 완전히 구현되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측면만 보아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눅4:22) 하면서,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취하신 속죄의 대업과 그분의 가르침을 겸허히 받아들여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주님께 돌아선 사람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부드러운 말을 사용함으로 더욱 많은 지혜(복음)를 가르쳐야 하겠습니다.“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언25:11).
잠언16:22절
“명철한 사람에게는 그 명철함이 생명의 샘이 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 어리석음이 벌이 된다.”(새번역)
21절에서 묘사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의 가르침은 22절에서는 생명의 샘으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명철한 사람’으로 비유됩니다. ‘명철’은 ‘지각있다, 사려깊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세켈’의 번역입니다. 사려깊은 사람들은 생명의 샘이 되고, 솟아오르는 물은 너무나도 시원하여, 공동체는 어리석은 행동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생명의 샘이 되어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있습니다(요4:14). 한편, 후단을 직역하면 ‘어리석은 자의 교훈은 어리석음이다’로서, ‘교훈’은 풍자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어리석은 자가 그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막대기로 맞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의 핵심은 도덕적 오만함입니다. 하나님은 오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 어리석음이 벌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요약하면 22절은 두 종류의 교훈을 보여줍니다.(1) 지혜로운 자가 주는 생명의 가르침. (2) 어리석은 자가 받는 벌. 명철한 자는 앞의 가르침에서 생명의 샘을 발견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의 결과 고통스럽고, 쓰디쓴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죽자 르호보암이 왕 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세겜에 모인 이스라엘 10지파에게 포악한 말로 자신의 도덕적 오만함을 여지 없이 드러냈습니다. 왕국은 갈라지고 오직 유다 지파만 그를 따랐습니다. 주님은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는데, 그 원인은 아버지 솔로몬의 우상숭배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신중하게 하고, 하는 말에 설득력이 있다.”(잠언16:23,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