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2/07 – 11)

시편74:10
“우리에게는 어떤 징표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예언자도 더 이상 없으므로, 우리 가운데서 아무도 이 일이 얼마나 오래 갈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새번역)

고려가 멸망한 뒤 야은 길재 선생은 망국의 한을 시조로 읊었습니다. 이 시 역시 바벨론에 의한 성전 파괴와 유대 왕국 멸망 사건(BC 586)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낸 그 위대한 솔로몬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 때처럼, 천사들을 보내셔서 바벨론 군대들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스라엘을 치고 승리에 도취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황무한 예루살렘 성전을 또 다시 보면서 한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곳에서 벌어진 처참한 파괴들과 고함 소리에 잠겨 있습니다(3-8).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선지자들도 보내시지 않았습니다.(9). 그 멸망의 상황은 ‘영원한’ 것 같았습니다(1,10). 시편 기자는 ‘고난의 바람은 그치지 않고 세차게 몰아치나, 주님은 침묵하시는 순간’을 아주 잘 포착하였습니다. 이때 신자의 가슴에는 절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이런 어둠의 날들은 주님의 백성들이 언제나 겪는 경험의 일부라는 사실을 재확인해 줍니다. 이 시는 고난의 물결이 우리 삶의 배를 휩쓸어 가려고 할 때 그것을 묶을 수 있는 말뚝을 줍니다. 우리는 만유의 창조자이신 주님과 그분의 능하신 행적을 돌이켜보면서(12-17), 고난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하여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견디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약1:2-4,현대인의성경)

시편75:7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만이, 이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저 사람을 높이기도 하신다.”(새번역)

1,000미터 쇼트트랙 경기에서 편파 판정으로 실격 당한 황대헌 선수는 낙담하지 않고,1,500미터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중국 선수는 한 명도 진출 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언론은 한국을 맹비난합니다. 원래 심판은 공정하였는데, 한국이 심판을 압박하여 중국선수만 편파판정으로 탈락하였다는 것입니다. ‘공정한 심판의 필요성!’ 이는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시편75편은 천지의 조성자이신 하나님께서(3), 공정한 재판장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7). 그분은 현실의 역사속에서도 정의를 집행하고 계시지만, 궁극적인 행위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정한 기약’이 이르러야 합니다(2). 그날은 이미 정해져 있고, 재판장으로 우리 주님이 임명되셨습니다(행17:31).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 중 하나입니다(요5:27). 악을 행하면서 재물,권력,건강과 세상의 행복(?)을 누리는 ‘이 세대의 아들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회개하여 악에서 돌이킬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73:18,19).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주 만물, 시간과 공간 그리고 태양 등은 전 인류에게 창조주의 존재를 말없이 그러나 명백히 선포합니다(시19:1-3). 오직 성경만이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엡1:3; 벧전1:3).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기 위해서는 만나고 사귀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십시요. 그러면 서로 사귐을 경험할 것입니다. “주님은 악인의 오만한 뿔은 모두 꺾어 부수시고, 의인의 자랑스러운 뿔은 높이 들어 올리실 것이다.”(시75:10새번역)


잠언16:14절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왕의 정당한 진노는 형벌의 집행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사자들’이라는 은유는 우가리트 신화를 암시합니다. 바알은 생명의 신이고 모트는 죽음의 신으로 사신들을 보냅니다. 모트의 사신들이 죽음을 선고하듯이, 왕의 진노는 죽음의 전조입니다. 주님은 악인들에게 죽음을 선고하시는 궁극적 행위자이십니다. 인간은 집행 시기를 모르지만, 집행자를 알고 있습니다. 집행자는 공의로운 왕입니다. 솔로몬은 등극 후 통치의 암적 요소인 군대장관 요압, 이복 형 아도니야, 왕 다윗을 저주하였던 베냐민 지파 시므이를 처형하였습니다. 그 뒤, 그의 왕국이 굳건하게 되었다고 열왕기 기자는 평가하였습니다 (왕상2:22-46).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나 타인에게 향한 왕의 진노를 쉬게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겸손(15:33), 참회와 고백(28:13), 왕국에 대한 새로운 충성심(16:6), 그리고 인내하며 부드럽게 대답하는 것입니다(15:1). 좋은 예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꿈 사건입니다. 왕은 꿈을 꾸고 그 꿈을 기억해 내지 못하여 고민하였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바벨론 지혜자들-박수, 술객, 점쟁이, 술사 -은 사형집행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두려워 하지 않고 왕에게 온유하게 요청하여 시간을 허락받자,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여 꿈의 내용을 응답받았습니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 앞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주님의 지혜의 시작이며, 끝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약1:5,새번역).

잠언16:15절
“임금의 기쁨은 봄비를 실어오는 구름과 같아 그 얼굴에 화기가 돌아야 모두가 살게 된다”(공동번역)

15절은 풍성한 삶을 위해서는 주님의 통치 대리자인 왕의 호의를 얻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 화기가 돌아야’는 직역하면 ‘왕의 얼굴의 빛 속에’입니다. 이 표현은 바벨론의 비유법으로, 누군가를 향한 통치자의 호의를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태양으로 불리워졌고, 그의 얼굴의 화색은 태양 빛에 비유되었습니다. 시편은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님과 관련하여 이 비유를 빈번하게 사용합니다. 따라서 그분이 임명한 왕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통치를 받는 신자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듯이, 그분의 왕 역시 신하들에게 충만한 삶을 부여하는 매개적 역할을 합니다. 구름은 지면에 생명을 붘돋게 하는 봄비를 예고하기 때문에, ‘임금의 기쁨’은 구름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 이른 비(가을비)는 10월 중순 경 내려서 땅을 기경할 수 있게 만들고, 늦은 비는 봄에 내려 마지막 추수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정하신 법칙입니다. 생명의 저자이신 주님은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의로운 왕(지도자)를 임명하십니다. 왕의 진노는 죽음을, 호의는 풍성한 삶을 예고하기에 마땅히 왕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좋은 예가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페르샤 왕 아닥사스다의 호의를 얻어 팔레스틴 지역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정직한 통치를 하였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공의로운 지도자들을 사용하여 주님이 통치하심을 인정하고, 그들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13:1)

잠언16:16절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16:16-30절까지는 ‘선한 말과 나쁜 말’에 관한 주제를 다룹니다. 이 주제는 3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논해집니다: (1)도입부분(16-19) (2)선한 말(20-24) (3) 나쁜 말(25-30). 16절의 주제는 ‘지혜를 얻는 것’에 관한 교훈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은 금이나 은을 얻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지혜는 귀금속과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값집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물질적인 혜택과 영적인 미덕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잠3:13-18). 이 반면, 지혜가 수반되지 않는 재물은 탐욕이나 무자비한 개인주의에서 나오기에 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의 삶은 주를 경외하여 악을 떠난 삶을 말합니다(욥28:28). 그런 사람의 삶은 당연히 영적인 미덕으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현대 문명에서 철학자들은 ‘소외’라는 단어를 자주 꺼냅니다. ‘소외’는 개인이 사회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여 거리가 있는 상태를 말하나, 철학의 경우는 ‘인간이 자기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인 상태에 놓이는 일’로 정의합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부조리로서, 물질(돈)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설정하여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성경은 물질보다 사람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기독정신의 핵심 요소입니다. 사랑의 순서는 ‘하나님 – 자신 – 타인 – 물질’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지혜이며, 그 안에서 재물을 벌어들이는 것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그런 재물은 자신을 보호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잠언 16:17,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