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16:5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새번역)
5절은 4절 후단의 ‘악인’을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으로 더욱 정확히 정의한 뒤, ‘악한 날’이란 ‘벌을 받는 날’로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5절은 악인이 심판받을 것을 법칙화 하고, 그런 이유는 바로 주님이 역겨워 하시기 때문임을 알려줍니다. ‘거만(교만)’이란 자신을 높이고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비판은 지혜로 가는 길에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또한, 거만한 자는 자신의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무시하기에 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을 두려워하여 늘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낮추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지혜가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데 참여하지만, 하나님은 정의를 확립시키고 찌기를 제거하십니다. 거만한 자들이 찌기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는 그 날에 모든 거만한 사람 위에 자신을 높이실 것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사례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보고도 마음을 완악하게 한 파라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결국 이집트는 황폐하게 되었고, 그의 군대는 전멸하였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다른 메시야를 찾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의 불순종과 거만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은 깨졌습니다, 그 후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야와 신념을 가지고 로마제국과 두 번에 걸친 독립 전쟁을 벌렸으나 멸망하였습니다.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잠언16:6,새번역).
잠언 16:6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새번역).
‘어질고 진실하게’는 ‘인자와 진리’를 풀어쓴 것입니다. ‘인자’의 원어는 ‘헷세드’로서 ‘언약적 사랑’을 말합니다. ‘진리’는 ‘진실함, 신실함’을 뜻하는 ‘에메드’의 번역입니다. 결국 ‘인자와 진리’는 합쳐서 ‘주님과의 언약에 기반을 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잠언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될 때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이 아니라, 궁핍한 사람에게 베푸는 인간적 친절을 뜻합니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물론 회개하는 마음 없이 번제를 드렸다고 용서받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잠언은 죄 용서를 위한 희생제사를 보충하는 인간의 미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레16:21).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희생제사를 드려도 소용없습니다(삼상15:22). 그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되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된 것입니다. 6절 후단은 이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당연히 공동체 속에서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기를 그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사고는 발생할 수 있어도, 재앙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특질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이를 열어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깨닫은 사람의 삶은 주님을 경외하는 열매로 가득차게 됩니다. 결코, 논어나 성현의 말씀을 읽고 얻어질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면, …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잠언2:1-5)
잠언 16:7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새번역).
5,6절은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벌과(5-6a), 앞으로 저지를 죄(6b)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을 다루었습니다. 본 구절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원수에 대하여 승리를 얻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잠언이 말하는 원수는 의인에 대하여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과거의 죄악을 회개한 야곱이 다음날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로부터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이 범주에 포함되기는 어렵습니다. 야곱은 의인이 결코 아니고, 다만 회개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본 구절이 적용된 예가 상당히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삭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 찾아 온 흉년이,100년 만에 이삭의 때에 일어났습니다. 물과 목초지를 찾아 그랄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려던 이삭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실 터이니 그냥 가나안 땅에 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그랄에 거주하던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 판 모든 우물을 막고, 떠날 것을 통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우물들을 파자, 그때마다 그랄 목자들이 우물의 소유권을 다투었습니다. 이삭은 양보하고 그랄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가 우물을 팠습니다. 주님은 브엘세바에서 이삭에게 나타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에 아비멜렉은 이삭을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게 됩니다. 블레셋 족속은 이삭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은총의 방식입니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잠언16:8 새번역)
잠언 16:8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잠언16:8 새번역)
8절은 이른바 ‘..보다 낫다, better than’ 의 구문으로서, 5-7절에서 선포한 일반적 명제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5-7절은 거만한 자에게는 벌이 내리고, 미덕을 행한 자에게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명제를 가르치지만, 이 세상에서는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때 본문은 판단에 도움을 줍니다. ‘의를 겸한 적은 소득이 낫다’는 의미는, 사람이 공동체를 경건하게 섬기더라도 주님은 즉시로 물질적 보상을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은 당신의 심판의 시기가 올 때까지, 악인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벌어들인 많은 소득’을 누리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본 구절을 15장16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와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8절에는 ‘주님(여호와)을 경외하는’이란 어구가 생략되고, ‘의롭게 살며’로 대체되었습니다. 주님은 때가 되어 도덕적으로 거꾸로 된 세상을 바로 잡기 전에는 무심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때가 믿음으로 의를 행할 시기입니다. 인천에 공장을 두고 한국의 유리 산업을 개척하여 큰 공헌을 한 고 최태섭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이분은 1951년 1.4 후퇴시 모두 피난갈 때에, 오히려 은행을 찾아가 채무를 갚고 영수증을 받은 뒤 피난을 갔습니다. 기적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받은 영수증은 그분의 신용을 증명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무담보로 2억원을 차용하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돈 문제에 직면할 경우 늘 본 잠언을 마음에 두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16:9, 새번역)
잠언16: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16:1-9절은 주님의 섭리적인 통치를 보여줍니다. 1절은 시작하고, 9절은 같은 표현을 써서 결론을 맺습니다. 양 구절은 인간이 주도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부분과 그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행동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균형 있게 교훈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결정권자이시면서도, 그분의 결정은 가장 온전하십니다. ‘그 발걸음’이란 ‘그의 길’과 동의어로서 인생의 행로를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발걸음들’대신에, ‘발걸음’으로 표현하여, 단 한 걸음도 주님의 감독을 떠나 취해질 수 없음을 암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상세하게 자신의 길을 계획할 수 있지만,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계획을 수행할 수 없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거칠게 깍고 만들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이루신다.” 우리는 늘 겸허히 주님을 경외하면서 주도적으로 삶을 해석하고, 이끌고 나가야만 합니다.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목적을 달성하는 우리의 결정과 방법이 틀리면 주님이 바른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천하만민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주시고 하란을 떠나라고 하였지 갈 지역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영화롭게 할 땅을 고민한 뒤, 가나안 지역을 선택하였고 전 재산을 이끌고 갔습니다. 세겜 모레 상수리 나무를 지날 때 주님은 나타나셔서 그의 선택이 옳음을 확증하셨습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언16:1,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