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73: 1-14 : 진리와 배치되는 현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1절, 새번역)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신다는 진리는 아삽의 경험과 충돌하였습니다(2-14). 늙은 아삽은 자신이 매일 겪는 명백한 고통- 질병(?) -과 악인의 번영(3-5)을 비교하며 고뇌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의 일반은총 (145:9)이 아닙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경외하며(34:8,9) 기도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에게 약속된 선하심을 말합니다. 아삽은 안팎으로 정결한 삶(13)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도덕적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재앙과 벌만을 경험하자, 믿음이 흔들렸습니다(14). 욥과 같은 체험이었습니다. 반대로 악인은 번영하였으니 저절로 질투가 올라왔습니다. 아삽은 그들이 불치병도 없이 죽는 것까지도 목격하였습니다. 교만이 그들의 성품이었고 타인을 착취하는 것이 그들의 행동이었습니다(6). 그들의 교만한 혀는 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으며, 많은 추종자들을 가졌습니다(10).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내용이었습니다(11). 그러나 그들은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였습니다(12). 여러분은 어떻게 이겨나가겠습니까? ‘호신론 護神論’이란 신학 분야가 있습니다. ‘신이 전능한데도 악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선하지 않다’, 그리고 ‘신이 선한데도 악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전능하지 않다’라는 명제가 대립합니다. 좋은 설명은 신이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서 악이 있는 세상을 허락하셨다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잠언16:4,새번역).
시편73:15-20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15)
주님의 통치에 대하여 번민하던 시편기자 아삽은 성소에 들어가자 깨딛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교만히 행동하고, 말하는 그들은 세상적으로는 축복이고 안전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멸망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속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심판으로 가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여 돌이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워야 할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처한 환경이 당황스럽더라도, 다음 세대의 주의 백성들을 낙망시키는 말과 행동을 삼가해야만 합니다(15). 만약 삼가지 않으면, 주님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악한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배를 통해 주님과 가까워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공자는 혼자서 하루 종일 혼자 생각해도 생산적인 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는 것을 버렸다고 논어에서 말합니다. 혼자 너무 기를 쓰고 기도하거나, 생각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16). 지혜와 지식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병들었을 때 의사가 주는 처방전을 받고, 약을 먹어 낫듯이, 그분이 준비하신 ‘은혜의 수단들’을 활용해야만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십시요!(17) 셋째, 영원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전개하여 대단원을 미리 내려보십시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먼저 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후 주어지는 영원의 자리를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자명해 집니다. 악인들의 영원은 너무나도 불안합니다(17-19). 그들은 ‘완전한 속임과 멸망’(18)의 희생물입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57:21).
시편73:21-28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28,새번역)
이 마지막 부분은 승리의 찬가입니다. 시편기자 아삽은 괴로운 생각이 가득 차고 정서적으로 땅 바닥까지 떨어지자, 잘못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삽은 고백합니다: “아, 나는 주님 앞에서 한 마리 짐승과 다름 없었구나!” 그리고 주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27,28). 궁핍한 아삽은 여전히 부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23). 주님은 늘 자신을 붙잡아 주시기에 안전한 현재의 삶을 누리고(23), 하늘에 가기까지 주님의 교훈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상을 떠날 때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섬기려고 애를 쓴 자신을 영광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24-26).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멸망하는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는 피난처요, 알 수 없는 그 선하심입니다(27-28). 여기에 신실한 신자를 위한 사중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동행(23) (2)하나님의 붙드심(23) (3)하나님의 계획 하에 있는 미래(24- 인도해 주시고) (4)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24-내세의 확신). 악인들은 이것들을 알 수도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한 아삽은 지혜를 가졌고 하늘의 분깃을 강조합니다(26). 레위지파는 가나안 정복시 땅을 분배받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검소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었습니다(수13:14,33). 주님은 공평하십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전3:13,새번역)
잠언16:4절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새번역)
많은 성경학자들은 “악한 자들은 자신의 심판의 날(악한 날, 재앙의 날)을 위해 지음받았다(결정론은 아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악한 행동을 섭리 가운데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는 해석이 옳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이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제들과 보디발 아내의 악한 행동을 섭리 가운데 사용하시어, 요셉을 이집트의 권력구조의 최정상에 있는 파라오 다음 가는 위치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 목적은 단순히 요셉에게 영광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서운 기근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처와 생명을 공급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갈공명과 같은 지혜자를 요셉의 자리에 앉히셨다면, 이집트 인들은 구원받았겠지만, 야곱의 족속은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자세히 또 끝까지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멸망 당할 때(비시605-586년), 유다의 관점에서 이는 ‘재앙의 날’이었습니다. 성전이 불태워지고, 그 사회의 지배자들과 귀족의 자제들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습니다. 바벨론의 관점에서 이 승리는 그들의 신들이 하사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은 우리에게 진실을 전합니다. “주님은 유다 왕 여호야김을 느브갓네살의 손에 넘기셨다”(단1:2).”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선하신 목적들을 이루십니다. 악한 자나 그들의 악한 행동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지혜와 믿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