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1/03 – 07)

시편72:1절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그 내용은 솔로몬의 시대에 잘 들어 맞습니다. 그는 시바 여왕을 포함하여 왕들의 존경을 받았으며(10절: 왕상10:1-13), 그의 제국은 평화와 번영이 그 질서를 이루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왕상10:14-29). 솔로몬의 제국은 메시야의 나라의 모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는 본 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적용한 예는 없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왕과 그의 통치에 대한 묘사는 이사야11:1-5과 이사야 60-62장의 예언들과 너무나 가깝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그 예언들이 메시아적이라면, 당연히 이 시 역시 그렇습니다. 이 시에 나타난 정의와 평화 그리고 번영의 언급은 솔로몬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 솔로몬의 능력이 미칠 수 없습니다. 그 소명은 오직 메시야 안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이 아람어로 번역한 탈쿰역을 보면, 1절에 등장하는 ‘왕’ 앞에 ‘메시야’라는 단어를 덧붙여 놓았습니다.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그 밤, 주님은 솔로몬에게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그는 ‘듣는 마음’ 즉 판단력을 구하였습니다. 주님은 기뻐하셔서 지혜는 물론 부와 명예도 약속하셨습니다. 다만, 솔로몬이 다윗과 같이 주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킨다면 장수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땅의 지혜를 얻어 성전도 세우고, 부도 얻고 명성과 권력도 얻었지만, 하늘의 지혜인 주님 경외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하여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는 60세로 단명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시편73:13절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새번역)

이 시는 다윗 왕 시절 성가대장이었던 아삽의 저작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전능하심에 회의가 드는 사건들을 종종 만나거나, 그분의 아버지되심이 무색할 정도로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분의 존재 자체까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들은 이런 현실에서 숨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직면합니다. 시편 1권(1-41편)은 경건한 자의 번영을 노래하면서 시작합니다(1:3). 그러나 시편2권(42-72퍈)은 인생은 미덕과 보상 간에 비례적 관계가 없다는 눈물어린 고백(42:3,5,9-10)으로 시작합니다. 시편3권은 다음과 같은 퉁명스러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73장) : 경건이란 시간 낭비아닌가(13)? 악인들은 즐겁게 살 때 우리는 온 종일 재앙을 당하고 벌받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14)? 그렇다면 이런 삶을 포기하고 그 행복한 넓은 길에 합류하는 것이 어떨까(10)? 아삽에게 주어진 유혹을 우리 역시 느끼곤 합니다. 아삽은 몹씨 고통스러워 하였지만 마침내 성소에 들어가서 악인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17). 그들은 회개할 사이도 없이 창졸 간에 멸망하고 자취도 없이 사라질 존재였습니다. 아삽의 가슴은 찔린 듯이 아팠습니다. 마치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22). 그러나 자비롭게도 주님이 자신을 붙뜰어 주심을 체험합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시이기에 며칠에 걸쳐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잠언16:2절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

2절은 인간의 경영에 대하여 통치하시는 주님이라는 주제를 계속 다룹니다. 주님은 인간의 마음의 계획들(1절)을 평가하십니다(2절).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지만 주님은 진리를 따라 평가하시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세상의 재판장이십니다. 주님은 속마음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정당하게 평가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부정을 인식하였을 때는 그것을 고백하고 자비를 호소해야만 합니다. ‘꿰뚫어 보신다”혹은 “감찰하신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토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측정하다, 양이나 무게 등을 재다’의 뜻입니다. 이런 비유는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죽은 후에 자신의 마음이 진리를 잣대로 측정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속마음 또는 동기들을 꿰뚫어 보지 못한채, 계획하고 집행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계시된 기준이 있기 때문에, 동기와 행동을 달아보고 평가할 수 있는 보다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물론, 동기의 정결에 대한 마지막 평가는 주님께 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잣대로 재고는 스스로 만족해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행동과 결과를 주님께 맡긴 뒤,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경영하여야 합니다. 또한, “사람이 자신의 동기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타인을 어떻게 마음대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곰곰히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잠언16:3절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새번역)

주님은 사람이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주권을 갖고 계시며(1절), 오직 그분만이 동기의 순수성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2절). 그러므로 우리가 계획하는 모든 일의 성패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형통할 것입니다(3절). 때로는 악한 자들이 일시적으로 승리 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패배하기 마련입니다. 그 반면 2절과 3절은 경고도 줍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말과 행위에서 정결함을 보지 못하신다면, 우리의 계획은 좌초될 것이다. 그러므로 3절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1절과 2절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맡기다’의 히브리어 단어는 ‘골렐’이며, 본 뜻은 ‘(돌을) 굴리다’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양들을 먹일 우물을 큰 돌로 덮었다가, 양떼들이 모이면 그 우물에서 돌을 굴려(골렐) 물을 먹입니다. ‘돌을 굴리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일을 주님께 굴려서 그분에게 맡겨야 합니다. ‘골렐’은 의성어로서 이 단어의 히브리어 발음은 마치 돌이 굴러가는 소리와 거의 흡사합니다. 굴러가는 상대방은 다름아닌 주님입니다. ‘일, works’은 계획된 행동이나 수행된 행위를 말합니다. 신실한 신자는 자신이 하는 일이 성취할 것인지 여부나 그들의 동기에 대하여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평가나 성공여부는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지,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자신을 믿고 사는 세상 사람들은 일의 결과를, 염려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기도와 평화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특권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5:7).

잠언16:3절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새번역)

어제는 계획하고 주님께 그 결과를 맡기면 된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절하실 권한도 있습니다. 사무엘하7장은 이 측면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불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계획을 밝히자, 나단은 즉시 승인합니다. 그 밤에 주님은 다윗이 성전을 세우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신 주님은 다윗의 가문을 위해 영원한 집을 세울 것이며, 그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다윗은 계획을 바꾸어, 남은 생애를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모든 계획은 하나님이 완전히 뒤집어 엎을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수립되여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 계획을 승인하시고 이루어주셔야 한다는 기도를 그치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일의 결정권자이십니다 (1절). 오히려 우리 모든 삶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김으로써, 인간적인 계획은 좌절될지라도, 우리 삶에서 이루어가시는 좀 더 깊은 주님의 계획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15:31절, 32절을 본 구절과 함께 읽으면 그 의미가 뚜렷하게 다가옵니다. 또한, 왜 솔로몬이, “아이들아,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라.”(3:11, 새번역) 교훈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책망을 들어야 비로소 우리 삶과 인격이 교정되어갑니다. 지혜는 여기서 생기는 것이고, 그것을 알아가는 방법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목적에 맞게 지으셨습니다. 심지어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해 지어놓으셨습니다(4절). 주님을 신뢰하여야만 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