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12/27 – 31)

시편69:22-23절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지금도 그렇지만 바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로마서(11:8-9)에서 사도는 그들의 불순종을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돌립니다. 율법(신29:4), 선지자(사29:10), 그리고 성문서(시편69:22-23)의 말씀이 그 근거로 인용되었습니다. 세 번째 인용된 시편69편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삶, 특히 그분의 고난을 뒷받침하는 성경이었습니다(막3:21 등). 사도가 본 구절에 나오는 다윗의 원수들을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 적용한 것은 타당합니다. 주의할 점은 인용된 시편의 상세한 부분 보다 일반적 의미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밥상 table’의 히브리 원어는 ‘식사를 위해 땅 위에 펼쳐놓은 동물의 가죽-보자기’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가까우며 친숙한 그 가죽 보자기는 때에 따라 덫이 될수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모세 율법의 규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매하게 된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사29:10). 성경의 신비입니다. 가장 가깝고 잘 아는 율법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자, 율법은 덫으로 화하여 그들을 실족시켰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가지고 있는 신비와 이중적 성격(영생과 영벌의 소식)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시편69:25절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가룟 유다의 직을 대신할 사람을 뽑자는 사도 베드로의 제안의 근거입니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행1:20). 여기의 시편은 69:25절(앞부분)과109:8절(뒷부분)입니다. 또 한 명의 사도였던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시는(행12장) 이런 제안이 없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시편 69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당한 깊은 곤경을 토로하면서 구원과 원수들의 심판을 호소합니다. 초대교회는 본 시편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분을 배반하고 거절한 자들을 묘사한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편 69:25절은 자연히 가룟 유다에게 적용됩니다. 가룟 유다가 산 밭은 나그네를 위한 매장지로 사용되었고(마27:7), 그의 거처는 황폐하였습니다. 다만 히브리 원문은 ‘그들의 거처’(복수)이지만, 베드로는 ‘그의 거처’(단수)로 변형시켜서, 다윗의 저주가 가룟 유다 한 사람에게 적용되게 하였습니다. 이런 해석과 적용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사도들에게 주어진 지혜와 권한입니다. 이런 사도들도 로마의 속국으로 있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알 권한은 없었습니다(행1:7). 성경은 세속 역사를 알려주는 예언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신천지와 같이 성경의 예언을 사사로이 풀어 특정인과 특정 시기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파멸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언을 푸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이미 확립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바울의 편지들’임)을 잘못 해석해서,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벧후3:16, 새번역).

잠언16: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한 단락을 이루는 잠언 15:31-16:15절은 15:31-33절에서 ‘주님을 경외하여 겸손히 살면 명예롭게 될 것이다’는 지혜를 다루고(서론부분),  본론인 16:1-15절에서 그 근거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1절은 계획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결정(말의 응답)은 주님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계획을 세워야 하지만 – 하나님이 계획을 세워주시는 것이 아님 – 그 계획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계획은 주님의 통치에 따라 좌우됩니다. 인간이 세우는 계획이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서로 상의하여 의논하고 잘 정리하여 주의깊게 계획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수립된 계획은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따라 수행되어야 열매(성공)가 맺힙니다. ‘경영(계획들)’의 원어는 ‘배치 or 정돈’‘을 뜻하는 ‘마르케’로서, 전투진형을 배열하듯이 주의깊게 요소요소에 배치하거나, 혹은 제사를 위해 나무를 차곡차곡 쌓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경영’은 생각나는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계획들을 지칭합니다. 물론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꾀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 가야만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음을 듣고 울며 자신이 가서 성벽을 중수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금식하였습니다. 어느 날 왕을 섬길 때 그런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곧 주님께 기도하고 왕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왕은 선선히 승락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의 주관자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느1, 2장).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 (잠언21:1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