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69: 9절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신약의 두 곳, 요한복음(2:17)과 로마서(15:3)에서 본 구절 전단과 후단을 각각 그리스도께 적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와 말기, 두 번에 걸쳐 성전 정화 작업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초기의 것을 증언합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2:17). 원수들은 성전에 대한 다윗의 심오한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방하였습니다. 그 만큼 다윗이 주님의 집(성전)에 대한 열심은 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요한은 다윗의 경험에서 그리스도에게 발생될 예언적인 패러다임(틀)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현재 당하는 비방은 그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날 비방을 미리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소, 양, 비둘기 등 제사용 제물과 상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 이유는 순결한 예배를 보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열성이 결국 그리스도를 삼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나를 삼키고”라는 부분은 다윗에게는 열정의 강도를 말하나, 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포함시킵니다. 한편,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웃에게 덕을 세우도록 권고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착한 일(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을 행하시다가 많은 비방을 받았습니다. 바울 역시 다윗의 경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비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주님의 돌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맡기십시오” (벧전4:19,새번역).
시편69:21절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
마태복음이 전하는 십자가 사건입니다:“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마27:34,48). 같은 사건에 대한 요한복음의 증언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28-30). 마태복음은 생략하였습니다만, 요한복음은 본 사건이 구약의 성취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염두에 둔 것은 본 시편 구절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속의 계획의 일환이며 구약성경에 미리 기록되었습니다. 그 계획은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성취하시는 행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요한 이를 깨닫고 요한복음을 통해 증언한 것입니다. “응한다”의 원어는 ‘텔레이오세’로서, ‘텔레이오오 –(아무 흠도 없이) 완전하게 만들다’ 의 수동형입니다. 우리 주닝의 모든 생애는 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여 완전하게 하시는 삶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은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그들의 주님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동시에 수고와 고난이 신자의 삶에 늘 존재하는 이유는 이때문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잠언15:31절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본 잠언은 ‘밝은 눈’에서 ‘듣는 귀’로 초점을 바꾸지만,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같습니다. 만약 사람이 ‘생명을 주는 책망’을 듣는 귀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열쇠를 가진 것입니다. 사람이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 잠언 후단은 그를 ‘지혜자’라 호칭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듣는 귀를 위한 동기를 부여합니다. 마치 음식을 아름답게 장식하여 구미를 돋구는 것과 같습니다. 현자의 책망을 듣는 자는 누구나 지혜자의 공동체에 속하여, 즉시로 그들과 함께 살기 시작합니다. 이와 반대로 거만한 자는 혼자 지혜로운체 하며, 지혜자와 어울리지 않습니다(잠15:12). ‘듣는 귀’를 가진 자는 거만한 자와 달리 생명의 원천에 가까이 살면서, 아침마다 저녁마다 지혜의 책망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2:12).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능력은 그분으로부터 “듣는 귀와 보는 눈을 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입니다(신29:4).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가장 중시하여 보물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생명의 경계’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롬3:23)고 선포합니다.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자는 회개합니다. 겸손히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분의 피로 죄를 씻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습니다. 그의 남은 생애는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특징지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그는 지혜자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교훈을 저버리는 사람은 제 목숨을 잃고 책망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지각을 얻는다.”(잠언15:32,공동번역)
잠언15:32절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책망을 잘 듣는 사람은 지식을 얻는 사람이다.”(새번역)
본 잠언은 책망을 받아들이지, 반발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교훈합니다. 후단의 표현 중 ‘지식’이란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 원문은 ‘레브’로서 ‘속사람, 지성, 마음’이란 의미를 가지나 이 문맥에서는 지성(intelligence)을 뜻합니다. ‘레브’의 결여는 정신적, 도덕적 능력의 부족을, 그 반대로 ‘레브’를 얻었다는 것은 살아가기에 충분한 정신적,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또한 잠언19:8절은 “지혜(레브)를 얻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얻는다.”고 하여, ‘레브’를 얻는 것은 ‘자신(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행위임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훈계를 싫어 하여 ‘레브’를 얻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책망을 자주 받으면서도 고집만 부리는 사람은, 갑자기 무너져 회복하지 못합니다(29:1).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내어 이들로 하여금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라고 가르쳤으나 목을 곧게세우고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최초의 징벌이 40년 간 광야의 길을 돌게 하신 것이고, 그 절정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입니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깨졌습니다. 지금 팔레스틴 지역에 세워진 이스라엘은 세속국가일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분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책망으로부터 참된 지혜(호크마)를 얻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황금을 얻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잠3:14,새번역).
잠언15:33절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지혜가 주는 훈계이다.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새번역)
잠언15:30-16:15절의 서론은 15:30-33절이며, 끝 구절인 33절은 16:1-15절에 묘사된 주님의 통치와 섭리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열쇠는 주님을 경외하라는 가르침이며, 이것이 지혜의 핵심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면 겸손하게 되고, 사회적 명예는 덤으로 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 가는 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사회적 존중을 받는 길은 겸손입니다. 지혜는 마음(heart)의 문제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지혜자 중의 한 명이지만(31), 주님을 경외하여 겸손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참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국어사전은 ‘겸손’을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로 정의합니다. ‘겸손’의 히브리 원어는 ‘아나바’로서, ‘압제를 당하여 굽혀지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난을 충분히 통과하면 겸손해지게 되어있습니다. 거만하고 냉소적인 바보는 하나님의 계시를 경멸하지만, 잠언의 제자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도덕질서와 삶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한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그 질서에 반하여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주님께 백기를 휘두르고 투항해야 비로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벧전5:6). 유다의 웃시야 왕은 강대해지자 교만하여 왕에게 금지된 제사장직까지 행하려고 하다가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나병환자 아람 장군 나아만은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겸손히 순종하여 고침을 받고 그 믿음이 지금까지 회자됩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습니다. 우리는 다 모난 돌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징계를 겸허히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회적 성공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언22:4,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