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12/13 – 17)

시편69편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9절)

다윗은 이 시편에서 연약한 사람나와 고백합니다. 구약을 보면 이 시의 배경이 될만한 다윗의 삶은 없습니다. 다윗은 기록되지 않은 부당한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 자신은 성전 건축 준비를 위해 헌신하였지만(9), 재정적(?) 부정 행위에 연루되었다거나, 이 때문에 마땅히 행할 국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입니다(4). 다윗이 가진 정의감은 무디지 않았습니다. 비방과 배반이 일어나자 다윗은  자기정죄(5)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성품과 도덕적 민감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생명은 위협당하였고 증오는 계속되었습니다(1-4). 그를 지지하는 경건한 사람들은 모욕당하였고(6), 가족들과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8). 그의 신앙 고백과 삶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10-12). 곤란이 중첩하나 신속한 응답이 없자 의심이 들며 두려워하였습니다(17). 이 모든 것이 주님과 그분의 집에 헌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진정한 공격의 대상은 다윗이 아니라 주님이었습니다. 이 시편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저주들(22-28)의 이유입니다. 두 가지가 주목됩니다. 첫째, 이 시가 해결되지 않은 위기의 상황(29) 하에서 기록되었지만, 결국 다윗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으면 다윗은 평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도하고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둘째, 이 시는 시편 중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여러 번 인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영원과 맞닿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종들의 자손이 그 땅을 물려받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살게 될 것이다.”(시편69:36 새번역).

시편69편 4절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본 시편은 메시야 시로서 4, 9, 21, 22, 25절은 신약에서 빈번히 인용됩니다. 4절의 전반부는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마가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15:25). ‘율법’이란 시편을 포함한 구약성경 전체를 지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인 사실을 공개적으로 여러 번 증거하셨습니다. 그것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많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직접 선언하셨습니다. 좋은 예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신 기사입니다(요5장). 또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살리신 사건입니다 (요11장). 유대인들은 표적과 가르침 속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보았으나 오히려 미워하여 원수가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경험을 노래한 구절들을 예수께 적용하기 위해서는 ‘모형론 Typology’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만약 다윗이 까닭 없이 미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는 얼마나 더 미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자신이 의지하는 율법에 의하여 오히려 정죄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돌입니다. 복음의 신비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잠언15:28절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지만, 악인의 입은 악한 말을 쏟아낸다.”(새번역)

마음은 악한 생각들 혹은 정결한 언어를 구축하며, 탐욕 혹은 관대함의 원천이고(27), 선한 동시에 적절한 대답(23)을 하게 만드는 바로 그 열쇠임을 이 구절이 보여줍니다. 의인의 마음은 상대방의 삶이 선한 열매를 맺도록 적절한 말을 찾아 깊이 생각합니다. 현자는 준비된 답변을 가지고 있지만(23), 좀 더 적합한 대답을 찾아 여전히 연구합니다(2). 악인의 입은 악한 말, 즉 도덕적으로 불쾌하며 더 나아가서 해로운 말을 불쑥 내뱉고 맙니다. 마음과 입은 상호보완적인 존재입니다.‘악한 말을 쏟아낸다’는 문장은 성급함을 말하고,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는 문장은 ‘좋은 것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70인역이나 탈쿰역은 ‘좋은 것들’을 ‘신실한 것들’로 번역하여 사회적 배려를 강조합니다. 의인은 신중하며 자제력이 있습니다. 의인은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본 잠언은 이런 면들이 악인과 다름을 가르쳐 줍니다 . 악인의 마음에는 악한 생각, 꾀, 계획, 거만함으로 꽉 들어차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늘 분주합니다(24:2).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악인은 의인과 확실히 차이가 있습니다.  17세기 프랑스 대주교였던 페넬롱은 사려깊은 분이었습니다. 조언을 구하는 편지가 오면, 그는 깊이 생각하고 답변을 주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무려 2년이나 걸렸습니다. 이분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당연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엡4:29,새번역)

잠언15:29절
“주님은 악인을 멀리하시지만, 의인의 기도는 들어주신다.”(새번역)

이 잠언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의인을 판단하는 신학적 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이란 주님이 가까이 하여 기도를 들어 주시는 사람입니다(시145:18). 사람이 위기에 처할 때 만유의 주님의 돌보심은 가장 든든한 보장책입니다. 의인의 자랑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악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주님은 멀리하십니다. 그의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멀리하신다’는 의미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은혜 받지 못함을 뜻합니다. 주님과 악인 사이에는 교제가 없습니다. 양측 모두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극한 상황이 지옥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자비와 영광이 떠나 있습니다. 악인은 종종 경건한 사람으로 위장합니다. 누가 악인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혜자는 분별합니다. 지혜자는 사람 마음 속 깊은 생각까지 길어올립니다. 지혜자 또한 악인을 멀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잠언은 악인이 회개하는 모습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악인이 진정 회개한다면, 그는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적 회개는 악인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악하게 획득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늘 그렇듯이 예외는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주님과의 교제가 생명 보다 나음을 깨닫자 회개합니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구원의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하겠습니다.”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눅19:9-10, 새번역).

잠언15:30절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잠언15:30-16:15절은 3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도입부분(15:30-33), 주님의 주권(16:1-9), 그리고 왕을 통한 주님의 통치(16:10-15). 도입부분은 ‘듣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1-15절은 이를 상세히 교훈합니다. 본 구절에서 ‘눈이 밝다’는, 가르침을 받고 깨달은 마음을 지칭합니다. ‘좋은 소식(기별)’이란 문맥상 ‘주님의 통치’(16:1-15)를 언급합니다. ‘윤택하게 한다’는 ‘살찌게 한다’의 의역으로, 풍성함, 충만한 만족 그리고 건강을 말합니다. ‘뼈’는 사람을 뜻하는 제유법으로서 육체와 정신을 모두 포함합니다. 본 잠언의 실례는 빌립보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바울은 2년 동안 로마 셋집에 갇혔습니다(AD60년). 빌립보 교회는 또 다시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이 예물을 통해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물론, 경제적 곤궁도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바울은 매여 있었지만, 바울의 사정이 로마군대 내에 알려져 복음은 오히려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빌1:12-14). 사도 바울 자신의 눈이 밝아지는 계기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 소식을 빌립보 교우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는 매여져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놀라운 소식에 기뻤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신의 마지막 부분은 성도들 사이의 아름다운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도 이같은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십시오. 나와 함께 있는 교우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빌4:21,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