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12/6 – 10)

시편68편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1절)

시편에서 가장 떠들석하고 신나는 시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벳에돔의 집에서 언약궤를 메고 다윗 성으로 행진할 때를 기억나게 합니다(삼하6:12).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서, 언약궤의 행진은 하나님 곧 이스라엘 왕의 행진이었습니다. 아벡의 전투 후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으로 들어갔고, 지금 100년이 흘렀습니다. 시에서 잘 나타나 있지만, 다윗 왕이 앞서고, 레위인들이 메었으며, 수 많은 백성들이 뒤 따르면서 소고 치며, 여러 악기로 기쁘게 찬송한(25)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적은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언약궤가 광야를 행진할 때마다 모세는 기도 드렸습니다. 1절은 그것을 반복합니다(민10:35). 그러나 이 언약궤의 행렬은 가나안을 정복한 이래로 400년 동안 없었습니다. 다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지금에야 하나님이 당신이 거할 처소로 선택하신 ‘높은 산’(예루살렘)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1-6) 찬양의 팡파르/ (7-18) 왕의 행진/ (19-31) 왕의 위엄/ (32-35) 마지막 팡파르.  한편, 이토록 중요시한 ‘언약궤’는 400년 뒤 지상에서 사라졌으며, 그것을 보관하던 성전 역시 붚태워졌습니다. 어떻게 된 이유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때문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언약궤 자체가 그리스도의 언약의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관련하여 18절을 인용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4:7-8).

시편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새번역)

본 시편은 다윗과 그의 백성이 아비나답(오벧에돔)의 집에서 언약궤를 메어100년 만에 예루살렘의 성소에 안치하는 행진을 노래한 시라고 언급하였습니다. 그 행진은 출애굽을 완성하는 승리의 행진을 의미하나, 그러면 여기서 ‘사로잡은 자들’은 누구이며, 선물은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먼저 이 구절은 가나안 왕 야빈에게 승리하여 부른 여사사 드보라의 승리의 찬가(삿5:12)에서 뽑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승리하신 후 자신의 도성(높은 곳)에 들어가셨습니다. 반역자들에게는 공물을 부과시키고, 당신의 백성들과는 전리품을 나누십니다(19).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왕으로 등극하시기 위해 승천하시는 모습을 그린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모습을 이 구절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 그리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포로)들을 다시 사로잡아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사로잡은 자들로 구성된 교회의 각 성도들에게 선물(은사)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통해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힘을 공급하십니다. 교회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서로 결합하고, 각자가 그리스도께 받은 은사를 발휘함으로 몸이 자라되, 사랑 가운데 스스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엡4:16).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4:7-8).


잠언 15:25
“야훼께서 거만한 사람의 집은 헐어버리시고 과부의 밭 경계선은 지켜주신다.”(공동번역)

본 잠언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오기 전, 약자가 생명의 길을 걷고 있더라도 힘을 가진 악인에게 착취를 당한다는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4절(생명의 길을 걷는 슬기로운 자)은 25절과 함께 읽어야만 합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이런 악인의 행위를 심히 규탄하고 있습니다(사1:10-17 암2:6-8). 본 구절은 짧지만 ‘교차대구’,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提喩)법, 환유법 등의 문학적 기교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힘있게 전달합니다. ‘집’이란 삶의 필수불가결한 수단을 상징하기에, 집을 헌다는 것은 그의 삶을 파괴시킨다는 내용이며, 그것도 영원한 파멸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악인에게는 아주 두려운 존재입니다. ‘거만한 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을 높이고,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을 짓밟는 폭군을 뜻합니다(환유법). 또한, 남편 없는 과부는 고아와 함께 약자의 대명사로서 착취로부터 보호받아야만 합니다. 악인은 지계석(경계선의 돌)을 한 번에 조금씩 이동시켜 마침내 과부의 밭을 상당부분 잠식합니다. 이를 잘 알지만 힘이 약한 과부는 원한이 맺힐 수밖에 없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런 원한을 풀어줄 책임은 왕에게 있습니다만, 구약성경은 독특하게 하나님을 궁극적인 회복자로 선포합니다. 주 예수께서 억울한 일을 당해 불의한 재판장에게 호소하는 과부의 비유를 통해, 불의한 일을 당하나 수단이 없을 때,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인내할 것을 요청하신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여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잠언15:26절
“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26절은 ‘여호와(야훼, 주님)’라는 주제어로 25절과 연결되고,  25절에게 신학적 근거를 줍니다. 따라서, 25절의 ‘거만한 자’는 악하여 주님이 미워하시는 자로 암암리에 규정되며, 약자와 압제 당하는 모든 자를 대표하는 ‘과부’는 ‘정결’하여서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자임을 알게 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자애로운 임재를 거두어 가십니다. 그 결과 악인은 확실하게 영원한 죽음 속에 버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말’은 너무나도 주님의 마음에 맞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그분의 자애로운 임재는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됩니다. 한편, 솔로몬은 ‘악한 꾀’와 ‘선한 말’을 대조함으로, 악인은 불쾌한 말을 만들어 내는 존재이지만, ‘선한 말’은 좋은 사람의 외부적 표식임을 가르쳐 줍니다. ‘정결’이라는 단어는 제사 의식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거룩한 주님은 당신의 면전에서 부정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는 ‘깨끗함’으로 종종 설명됩니다. 물론 반의어는 ‘부정/깨끗치 못함’입니다. 오직 깨끗하고 정결한 자만 제사를 드릴 수 있고, 희생제물은 온전하고 정결한 짐승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 개념은 ‘도덕적 정결’이라는 의미로 전용되어 왔습니다. 가난하나 참된 사람의 계획이나 말을 들어보면 부정한 비윤리적 요소들 – 거짓됨, 왜곡, 거칠고 불쾌하게 함 – 이 없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주님 앞에서 성소의 순금과 같이 빛날 뿐만 아니라. 듣는 자들에게 달콤함을 주고, 그들의 뼈를 치료합니다. 우리는 이 길을 가야만 합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언16:24).

잠언15:27절
“불의한 이익을 탐내는 사람은 자기 집에 해를 끼치지만,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은 오래 산다” (새번역)

이 구절은 ‘집’이라는 주제어로 25절과 연결되고, 거만한 자(25)와 악인(26)이 자신의 집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예로서 ‘불의한 이익(뇌물)’을 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주어인 ‘불의한 이익을 탐내는 사람’과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을 중심에, 술어인 ‘자기 집에 해를 끼친다’와 ‘오래 산다’는 처음과 끝에 배열시키는 교차대구법을 사용하여 기억하기 쉽도록 되어 있습니다.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자’는 타락한 사기꾼, 특히 관료를 지칭합니다. 그의 집을 파괴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25). ‘불의한 이익을 탐내는 사람’의 반대에 서 있는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이란 선인(의인)의 특정한 행동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선인은 말도 정결하고, 뇌물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불의한 이익’을 탐낸 대표적인 사람은 구약에서는 게하시,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나병에서 회복된 나아만 장군은 사례하고자 하나 엘리사는 완강히 거절합니다. 이를 나중에 안 게하시는 분노하여 쫓아 가서 거짓말하여 은덩이와 두 벌의 옷을 받아 집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게하시와 그 후손들이 계속해서 나병환자가 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게 게하시의 집(가문)은 파괴당하였습니다 (왕하5:27). 가룟 유다는 겨우 은 30량을 탐내어 주님을 팔아 넘기나 목매어 죽고 맙니다. 그러므로 ‘오래 산다’는 어구는 그의 집의 계속적 보전이, ‘집에 해를 끼친다’는 그의 생명의 상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목숨을 살리는 책망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잠언15:31,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