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66편
“내가 마음 속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더라면,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지 않으셨을 것이다.”(18,새번역)
이 시의 배경은 불확실하지만,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하신 일은 ‘와서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초청의 근간을 이룹니다(1-7). 시편 기자는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주님을 지켜보라고 요청하면서,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찬양하고, 반역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냅니다(5-7). 시편 기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 속으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고”고 할 정도로 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10-12). 그러나 현재 주님이 그분의 백성을 대하시는 행동은, 과거에 그분이 행하셨던 일에 비추어 이해되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홍해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관점에서 봅니다. 그들이 홍해의 물 속으로 지나간 이유는 바로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주인인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12). 홍해의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도 같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죄로부터 해방이라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깨닫고, 현실에서 체험하여야만 합니다. 또한, 문제가 클수록 환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은총을 증거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그분의 거룩하신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17)와 거룩함(18)이 없이는 구원의 축복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좋은 예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서, 순교를 위해 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원하시려고 천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시편67편
“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6,새번역)
이 시를 추수 감사의 한 장면으로 본다면 흥미롭습니다. 1-3절에서 예배 인도자가 말하고(1행) 회중은 화답합니다(2행). 4절에 이르면 인도자와 회중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함으로 절정을 이룬 뒤, 다시 5-7절에서 주고 받고 있습니다. 주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추수기에 땅의 소산(오곡백과)을 주심으로 축복하신 것과 같이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하에 들어와 복을 받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무이하게 축복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축복 자체가 목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론의 축복(1절, 민6:24-26)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축복(창12:2-3)도 누리고자 합니다. 즉 그들이 축복을 받는 이유는 천하 만민에게 그 복이 미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복은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속사역을 말합니다. 그분을 깃발로 믿고 구원받은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모여듭니다. 한편, 6-7절을 보면 추수가 또 한 번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은 홍해의 기적과 같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시편65,66) 뿐만 아니라, 평범하고 해마다 계속되는 자비와 섭리 안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축복은 장차 올 더 큰 축복의 담보인 동시에(6), 온 세상을 포괄하는 보증이기도 합니다(7). 왜냐하면 추수는 전 인류 중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비유이기 때문입니다(사27:12-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67:7).
잠언 15:22
“의논이 없으면 계획이 실패하고, 조언자들이 많으면 성공한다.” (쉬운성경)
어릴 때는 부모가 필요하나, 어른이 되면 그 방면에 권위있는 조언자가 필요합니다. 본 잠언은 이 부분을 교훈합니다. ‘계획이 실패한다’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라는 의미로써, 좋은 친구가 주는 신뢰할만한 조언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현명한 결정에 이를 때까지 사랑으로 서로 고쳐주고 격려해주는 조언자들입니다. 거만하며, 고집이 세고 완고한 사람의 계획은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면서 계획을 세우기에, 그 결정은 이기적이고 현실을 무시하는 경향을 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교만한 그는 교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반면, 그 방면에 지식과 경험이 많은 조언자들이 함께 하면, 의논하는 계획마다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겸손과 신뢰를 기반으로 권위 있는 조언자들의 정당한 평가를 거치기 때문에 늘 성공하기 마련입니다. 실로, 많은 조언자들이 마음을 열고 정직한 조언을 줄 때, 계획 중에 숨어있는 잘못들이 바로 잡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약점, 무지, 그리고 한계를 상쇄시켜줄 조언자들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온 세상의 주인을 알고 그분 앞에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가르치시고, 깨우쳐주시는 분은 보혜사(保惠師-보호, 은혜, 스승)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란 헬라어 ‘파라클레이토스’의 번역으로 ‘돕기 위해 부르심 받아 옆에 와 계신 분’을 뜻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가장 훌륭한 카운셀러이시기에, 그분의 조언을 받아들여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하여만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잠언 15: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이 잠언은 ‘사메아-기쁨’을 다루는 단락(20-23절)의 최종입니다. ‘조언’은 서로 대화하면서 주고 받습니다. 만약 적절한 대답을 듣게 되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신의 좋은 조언(훈계)을 자녀들이 받아들일 때 기쁨을 갖습니다(20). 현자는 윤리적 조언(22-23)을 받고 주는데서(23) 기쁨을 느낍니다. 더나아가, 성인이 찾아갔을 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답을 주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여기서 ‘대답’ 이란 ‘마네’의 번역으로 ‘상황에 대한 참되고 올바른 반응’을 말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참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이유는 욥이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뒤, 회개하라는 대답(조언)을 계속 주었습니다. 물론 욥은 그런 대답은 잘못되었다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자 함께 듣고 있던 엘리후는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 세 친구의 말에는 욥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전혀 없고 다만 정죄하는 말만 나열하였기 때문입니다 (욥32:3,5). 한편, ‘아름답다’는 말은 ‘토브 – 좋다’는 뜻인데, 이는 그 대답(조언)이 너무나도 상황에 잘 들어 맞아서 대화를 나누는 모두에게 생명과 번영을 주게 됨을 의미합니다. ‘때에 맞다’는 기회가 생기는 적절한 때를 말합니다. 그것은 성급한 말(29:20)이 아니라, 준비되고 사려깊은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조언을 주는 사람이 그 상황에 꼭 알맞은 적절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상한 꿈을 두 번 겹쳐 꾸고 근심하는 바로에게 요셉이 적절한 대답을 준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잠언15:1, 새번역).
잠언 15:24
“슬기로운 사람이 걷는 생명의 길은 위쪽으로 나 있어서, 아래로 난 스올 길을 벗어난다.”(새번역)
24절은 교육의 기쁨을 다룬 단락(20-23)과 의인을 보호하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언급한 단락(25-29)을 연결합니다. 또한 현재 의인에게 주는 보상인 기쁨을, 주님과 연관된 영원한 생명으로 승격시킵니다. ‘생명의 길’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갖는 상태를 언급합니다. ‘위쪽으로 나 있다’는 말은 ‘아래로 난 스올(무덤)의 길’과 대조를 이루면서 무덤(죽음)을 넘어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을 함축합니다. 실로 준비된 생명의 길의 수혜자는 ‘슬기로운 사람’이고, 그들의 정체는 의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위쪽으로 나 있는 생명의 길을 걷는 결과, 자연히 ‘아래로 난 스올 길’을 벗어납니다. 그들은 인생의 참된 성공자입니다. 그러므로 스올(무덤, 죽음)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예기치 않게 죽지 않는다는 말 그 이상입니다. 생명의 길을 사망이 삼키는 것이 아니라, 사망이 생명(이김)에 의해 삼켜질 것입니다(고전15:54).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4:4) 명령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생명의 길을 걷기에 ‘슬기로운’ 사람이며, 스올로 상징되는 영원한 죽음(심판)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한편, 세상에 살 때 닥쳐오는 근심 걱정, 두려움, 문제 거리 등은 감사와 함께 기도로 아뢰면 됩니다. 놀라운 응답을 체험할 것입니다. 더구나 영생의 소망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늘 넉넉합니다. 본 구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적합니다. “야훼께서 거만한 사람의 집은 헐어버리시고 과부의 밭 경계선은 지켜주신다.”(잠언15:25, 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