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11/22–26)

시편64편
“의인은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주님께로 피할 것이니,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모두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10, 새번역)

인간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계시는가, 혹 계신다 하더라도 정의를 이루어내는 그분의 섭리가 과연 적극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종종 의문을 제기합니다. 만약 선하신 하나님이 진실로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선인과 악인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들 사이에 그토록 심한 운명의 불균형이 있을 수 있는가? 악을 행하는 자들이 상처하나 입지 않고 어떻게 그토록 자주 성공을 할 수 있는가? 이 시는 바로 이런 물음에 답하며,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게합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혀라는 칼을 날카롭게 갈고, 독을 먹인 화살과 같이 말(words)을 준비 합니다(3). 그리고 몰래 숨어 있다가  갑자기 느닷없이 쏘고서도, 거리낌조차 없었습니다. 다윗은 기가막혔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코웃음치며 묻습니다: “누가 보리요?”(5). 그리고는 성공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바로 그 무기(화살과 혀)가 자신들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갑작스럽게! 그래서 그들은 순식간에 쓰러질 것입니다(7). 왜냐하면 인간이 아무리 교활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어디에 겨누어야 하실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웃음 받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작동하고 있고, 결국 그들은 사람의 속담거리가 될 것입니다(8,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는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보호합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한 의인이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드리는 기도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피난처에서 찬양의 목소리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10). “주님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시편2:10후단,새번역)

시편65편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4)

이스라엘은 매년 대속죄일(레16장)과 그에 뒤 이은 장막절(레23:39)로 절정을 맞습니다 -죄의 제거와 추수감사 행사. 그러나 이 시는 특별했던 해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 해에는 놀라운 기도 응답을 받았으며(2,5); 죄는 엄연한 현실이었고(3); 하나님은 위엄있는 행동을 하심으로(5),  열국을 진정시키고(7) 열방에 확고한 명성을 확립하셨고(2,5,8); 그 해의 추수는 특별히 풍성하였습니다(9-13). 이 시에서 하나님은 구속자, 창조자, 공급자로서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사무엘하21:1-14에 기록된 3년 기근이 끝나던 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윗 시대에 3년 기근이 발생하였습니다. 주님은 모세율법 속에 이스라엘에게 적당한 때 비가 내릴 것을 약속 (신11:14)하셨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이례적입니다. 당연히 다윗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에게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지은 탓이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원래 400년 전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과 약조하여 살려 주는 대신 주님의 장막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350년 뒤 사울이 이를 어긴 것입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을 부르니, 그들은 사울에 속한 7사람을 목매달아 죽이도록 요청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들을 내어주자 기도는 응답되어 3년만에 비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본 시는 하나님이 부르신 이스라엘의 축복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축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후1:20,새번역)

잠언 15:19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두 번째 승자는 정직한 사람으로서, 그는 확 트인 큰 길을 활보할 수 있는 보상을 받습니다. 대조적으로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덤불된 울타리로 막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5:5은 사람이 접근 못하도록 가시로 된 강력한 울타리로 둘러싼 포도원을 언급합니다. 이렇게 가시 울타리의 비유는 통과할 수 없는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가시로 찌르고 고통을 주어 못지나가도록 막는 장애물입니다. 게으른 자 역시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장애물을 넘어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의 게으른 성품 때문에 시도도 안합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위험해서 도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반해 정직한 사람들은 대로를 걷습니다. 실로 그는 현인의 가르침에 맞추어 살아가려는 성품을 지녔습니다. 한편, ‘대로(highway)’는 여행을 쉽게 하도록 장애물을 제거하고, 잘 닦여져서 손쉽게 왕래할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 반면 준비되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돌이나 기타 장애물에 채여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잠언의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살아가는 자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을 만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게으른 자’와 ‘정직한 자’를 대조함으로, 잠언은 ‘게으른 자’는 ‘정직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게으른 종을 ‘악한 종’(마25:26)과 ‘무익한 종’(마25:30)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실천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25:30.새번역)

잠언 15:20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잠언15:20-29절은 ‘의로움’과 ‘악함’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언듯 보기에는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10:1)를 반복하는 양 보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아들’을 ‘미련한 자(아담)’로 대체하여, 유산을 이어받는 아들의 지위에서 그 유산으로부터 쫓겨난 사람(아담)의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범죄한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것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경멸하는 대상은 ‘지혜와 훈계’(1:7)이나,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잠언1:7에서 미련한 자가 멸시하는 대상은 ‘지혜와 훈계’이나, 본 절은 이를 ‘어머니’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물론 어머니는 부모를 뜻합니다(1:8). 또한 ‘즐겁게 한다’와 ‘업신여긴다’는 어구는 정확히 대조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부모를 기쁘게 하는 아들은 그분들을 멸시하지 않는 반면, 부모를 멸시하는 사람(아담)은 그분들에게 슬픔을 준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미련한 자는 고치기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중요하다는 자만에 빠져, 자신의 경건한 부모보다 똑똑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비극적인 모습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미련한 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표식이며, 절대로 잘못 판단될 수 없습니다. 한편, 지혜로운 아들이 아비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부모를 명예롭게 여기기 때문이요, 미련한 자가 어미를 업신여기게 되는 것은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을 명하는 제5계명의 존재 의의는 매우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출20:12,새번역)

잠언 15:21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미련함을 즐기지만, 명철한 사람은 길을 바로 걷는다.” (새번역)

21절의 “즐기다”는 말은 부모의 기쁨에서 자신의 기쁨으로 중심이 변했음을 보여줍니다. 미련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거만함은 도덕적 감각이 전혀 없는 자, 즉 거만한 바보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명철한 사람은 길을 바로 만들어 걷습니다. 이렇게 바른 길을 계속 가면 결국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24). ‘미련함을 즐긴다’와 ‘길을 바로 걷는다’라는 표현을 비교해 볼만 합니다.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도덕 질서를 위반하기 좋아하여, 무모하게도 마땅히 이행하여야 할 의무와 생명의 길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명철한 사람은 앞에 놓여져 있는 기쁨(영생)을 위해 자비와 진리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래서 잠언은 제자들이 통찰력을 가지고 살도록 소리 높여 외침으로써, 제자의 애정(21a)과 행동(21b)이 늘 바른데 머물러 있도록 훈계합니다. 지혜자란 현재는 부모님에게 기쁨을 드리고(20) 미래에는 자신에게 기쁨이 찾아오도록 합니다(21). 그러나 지혜가 결여된 어리석은 자는 부모의 훈계를 무시하고, 언제나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사람의 운명은 그의 생각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특히 복음을 들을 때 분명히 갈라집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죄를 심상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복음의 가르침을 멸시하고 자신의 미련한 삶을 그대로 즐깁니다. 이 반면 명철한 자는 장래 하나님 앞에 설 것을 두려워 하여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은 변화를 받고 주님이 걸어가신 의와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후2:15,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