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58편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11절)
이 시는 통치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문제를 심오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당시 통치자들에게 나타난 악의 스캔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교훈을 줍니다. 다윗이 부르짖는 이 외침을 듣는 우리 안에는 자연히 올바른 인격이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본 시를 읽는 사람들은 축복 받았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1-5) 악한 통치자들의 행동과 성품, (6-9) 악인들에 대한 심판의 기도, (10-11) 악인의 몰락과 의인의 기쁨. 시편51편과 비교하면, 다윗과 이들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권력을 잘못 사용하여,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악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51:5). 그러나 다윗은 회개와 동시에 주님의 용서를 간구하고, 돌이켜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본 시에 등장하는 통치자들 역시 태에서부터 죄의 경향으로 물들었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은 당연한데(3-5), 이들은 다윗처럼 회개하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계속 가다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권력의 남용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왕정 460년의 역사는 권력남용의 역사요, 하나님께 불순종한 역사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느 역사가는 ‘신은 제일 미워하는 자들에게 권력을 주신다’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 그 만큼 권력은 다루기가 심히 어렵고, 그 피해는 모든 백성들의 삶에 미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딤전2:2,새번역).
시편59편
“나의 힘이신 주님, 주님은, 내가 피할 요새이시니, 내가 주님만을 바라봅니다.”(9절, 새번역)
골리앗을 죽인 다윗은 사울 왕의 군대장관이자 사위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그날 밤 다윗은 아내 미갈의 도움을 받아 창문으로 도망을 쳤습니다(삼상19:11이하). 이것이 이 시의 배경입니다.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부분(1-10)은 구원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여 온 세상의 심판으로 넓혀가며 신뢰를 표현합니다. 둘째 부분(11-17)은 심판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여 계시가 온 세상으로 넓혀져 가도록 간구하며 신뢰와 찬양으로 끝을 맺습니다. 본 시편에서 “나의 잘못…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내가 허물이 없으나….”(3,4)라는 다윗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상모략으로 위태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반복적으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힘이요, 피할 견고한 요새입니다(9). 그러므로 다윗 자신을 목표로 삼은 개들은 여전히 배회하고 있었지만(14,15), 하나님은 그에게 한 노래를 주셨습니다: ‘나는 노래하며…찬송한다’(17)는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은 아침에 ‘주의 인자’를 노래하였으나, 주님은 밤에 노래하셨습니다. 한 밤 중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셨습니다. 소위 밤의 노래, 고난 중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높이사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되게 하셨으나, 다윗보다 더 큰 다윗인 우리 주님은 부활 승천하심으로 모든 것의 왕이 되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잠언15:10절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이 잠언은 책망을 듣고 잘못된 행위를 고치는 태도가 지혜의 중요한 부분임을 말합니다. 올바른 견책에 대하여 방어기재를 발동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본 잠언은 그 결국이 사망이라고 선언합니다. 즉, 사망은 정당한 책망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 돌아갈 궁극적 결과이며, 신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이는 영원한 심판이요 죽음입니다. 그 영원한 죽음이란 하나님 없이 고통스럽게 영원한 불속에서 지낼 악인의 운명(마25:41)을 말합니다. 그렇게 볼 때 본 잠언은 ‘부모의 훈계를 경멸하는 어리석은 자’(5절a)가 받을 벌이 어떤 것임을 보여줍니다. 바로 영원한 죽음으로, 모든 벌 중 가장 중한 것입니다. 또한 본 잠언은 9절의 뜻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의 길은 주님께서 싫어하시지만, ..”(9a). 배도자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임재를 상실당하며, 사망으로 향하여 가는데 불가역적입니다. 죽음에 이르를 때 그는 기도할 것이나, 쓸모 없을 것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왕위가 더 중요하였기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왕위에 도전한다고 생각되면, 가차없이 제거하였습니다(제사장 아비멜렉 가문의 85명의 죽음). 그는 블레셋과 마지막 전쟁시 크게 두려워 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하나님은 전혀 응답하지 않았고 절망에 빠진 사울은 모세율법이 금지한 신접한 여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다음날 사울과 그 세 아들은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의’의 길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망이 도무지 없다고 잠언은 장엄하게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 길로 가야만 합니다.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잠언12:28).
잠언15:11절
“’ 스올과 아바돈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리요”
10절의 끝은 ‘죽을 것이다”이며, 11절의 ‘스올과 아바돈’으로 연결됩니다. ‘스올’은 ‘죽은 자가 가는 곳’을 말하며, ‘아바돈’은 죽은 뒤 심판을 받아 가는 파멸의 장소를 의미하는데, 모두 무덤에 대한 단어입니다. 죽은 자의 영역까지도 주님의 감시하에 있으며, ‘배도자’(10절)를 거기로 보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정의로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하신 능력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땅속 깊이 있는 죽은 자들의 장소까지 감찰하시는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투명하게 드러나겠습니까? 여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조사, 감찰하시는 ‘도덕의 통치자’ 이신 하나님은 개개인의 행동을 지배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테스트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그분이 던지시는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8-10절). 유다 왕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들자 그는 심히 통곡하며 간구하였고, 주님은 이적을 보여주시면서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더 해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내어 유대 땅에 나타난 이적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습니다”(역하32:31). 그러나 히스기야는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무기고, 보물창고 등을 보여주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였습니다. 이사야는 보내심을 받아 120년 후 유대 자손이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을 예언합니다(사39:1-8).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받았을 때 주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지혜가 주는 훈계이다.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 (잠15:33,새번역)
잠언15:12절
“거만한 사람은 자기를 책망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며, 지혜 있는 사람을 찾아가지도 않는다.” (새번역)
본 말씀은 5-12절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아버지의 훈계를 경멸하는 어리석은 자가 여기서는 거만한 사람으로 변해 버립니다. 10절에서 생명의 길을 버린 ‘배도자’는 이 잠언에서 지혜 있는 사람을 피하는 거만한 사람이라고 규정됩니다. 지혜자는 구원의 지식을 값없이, 광범위하게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15:7) 거만한 자가 실패를 하여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물론, 오만하게도 현자가 주는 지식을 피해 버림으로써, 사망의 어두운 길에 계속 머무르고 있습니다. 잠언의 이 말씀은 결국 제자들로 하여금 현자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사람을 ‘거만한 자’와 ‘지혜자’자로 분류하고, 이들을 서로 대조함으로써 제자들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본 잠언은 ‘마음’에 관련된 새 단락(13-19절)을 도입합니다. 만약 누군가 교정 받기를 마음에 싫어하여, 현자와 사귀지 않는다고 하면, 그의 마음은 자아도취, 자기 사랑, 아첨이나 사소한 것에 마음을 주지 하나님이나, 진리나 의와 같은 중요한 문제를 피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싫어한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이 그들의 행사가 악하여, 하나님의 심판하에 놓여 있다고 책망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중 예수님께 배우고자 찾아 온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그 중 한 사람이 니고데모였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그들의 멸망을 예언하셨고, 부활 승천 후, 40년이 지나자 예루살렘은 로마에게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잠언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