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10/11- 15)

시편 52편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잎이 무성한 올리브 나무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의지하련다.”(8, 새번역)

본 시에는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에게 와서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있다’고 말하던 때” 라는 표제어가 있습니다. 그 배경은 삼상21-22장입니다. 도엑은 왕 사울의 목자장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놉 땅으로 갔고 제사장 아히멜렉으로부터 음식 등에 도움을 받고 바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때 거기에 있었던 도엑은 왕 사울에게 고자질하여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주었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도엑에게 명하여  제사장 아히멜렉 등 85명과 놉의 백성들을 죽였습니다.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도망가서 사건의 전모를 알려주었습니다. 이 참혹한 사건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을 알고 다윗은 분노하였습니다. 이 시에서 ‘포악한 자’는 도엑입니다. 도엑은 정당한 벌을 받을 악인의 상징이며, 다윗은 결국 높아지게 될 의인을 대표합니다. 시편 기자는  ‘뿌리째 뽑힌 나무와 쓰러진 장막’,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무성한 올리브 나무’와 같은 그림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이 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구조입니다.      

    A      악인의 어리석음(1–4)
       B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 (5)
       B′      지혜의 원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함 (6–7)
    A′      의인의 축복 (8–9)

그러나 우리가 굳게 붙잡을 것은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 같이 변함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며,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렵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 앞에서, 선하신 주님의 이름을 우러러 기리렵니다”(시편52:9)

시편53편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구나.”(1절, 새번역)

본 시편이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1-3), 그분의 백성을 압제하는 사람(4)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늘에서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직간접적으로 경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을 처리하실 것이기에 두려움은 불필요합니다(5). 마지막 절(6절)은 땅에 눈을 돌려 박해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 시는 시편 14편과 동일한 내용으로, 표현조차 비슷합니다. 다만 5절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14:5은 주님이 의인 중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을 때, 두려움이 원수들을 사로잡았다고 노래하나,  53:5은 오히려 원수들을 직면한 주님의 백성들 책망합니다. 이는 그들이 불필요한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 하였다”는 것은 바로 의인들의 불필요한 두려움을 책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수의 뼈를 흩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 두 시편은 같은 상황이나 서로 반대되는 측면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위험에 처할 때, 적들은 두려워 할 모든 이유를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워 하지 않을 모든 이유가 있습니다. 한편, 본 시편은 52편(포악한 도엑의 행위)과 54편(십에서의 사건) 사이에 있습니다. 모두 다윗이 도망할 때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어리석게 행동한 나발을 암시합니다(삼하25장).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새번역)

시편54편
“하나님, 주님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님의 권세로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여 주십시오.”(1절, 새번역)

본 시의 배경은 유대 족속 십(Ziph) 사람들이 다윗의 은신처를 두 번이나 사울 왕에게 은밀히 고해바친 사건(삼상23:19, 26:1)입니다.  시편 52편은 에돔인 도엑의 고자질로 인한 아비멜렉의 가문의 몰락이 그 배경입니다. 도엑은 이방인이기에, 다윗은 놀라지 않았습니다(삼상22:22,23). 그러나 지금은 동족 유대지파 사람들의 배반이었습니다. 다윗은 비통하였습니다. 본 시에서 다윗은 이런 위험하고 환멸적인 상황을 극복해 나갈 비단주머니 3개를 보여줍니다: 첫째가 기도요(1,2), 둘째가 진리에 대한 회상이며(3,5), 셋째가 미래에 대한 헌신(6,7) 입니다.  다윗은 먼저, 주의 이름으로 즉, 계시된 공의로운 성품과 일치하게, 주님께서 반역자로서 억울하게 취급되는 이 위협적인 상황에서 구출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의인의 기도는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적들은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무법자들이지만, 자신은 의로운 주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정의로운 주님의 심판을 기대합니다(3-5절). 끝으로, 다윗은 구원하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로서, 낙헌제(=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를 드립니다. 그 낙헌제는 조건이 없는 자발적인 감사의 제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통해 죄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술로는 늘 찬미의 제사를, 삶에서는 선행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시편1:1,2절, 새번역).

잠언 15:3절
“주님의 눈은 어느 곳에서든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모두 지켜 보신다.
.”(새번역)
이 구절은 ‘좋다, 선하다 – (토브)’라는 어근으로 2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좋은 혹은 선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수사법)은 선한 윤리와 관련되어서, 잠언이 전제하는 도덕질서의 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이 잠언의 앞 부분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뒷 부분은 모든 사람에 대한 그분의 도덕적 평가를 말합니다. “주님의 눈”(개정개역은 ‘여호와의 눈’)은 그분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어느 곳에서든지’라는 말은 ‘서울’ 혹은 ‘인천’과 같은 장소적 표현이지만, ‘선과 악’에 연결되어 모든 인류를 지칭하는 잠언적인 수사학입니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세상에 편재하시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놀라운 속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인간은 다릅니다. 후단에 등장하는 ‘지켜 보신다’는 말은 ‘높은 전망대에서 감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주의깊게 모든 것을 감시하고 살펴보는 파숫꾼과 같이 우리의 삶을 샅샅이 꿰고 계시며, 상황에 따라 그에 적절한 행동을 취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보여지지는 않으시나 보지 못하는 분이 아니신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시험하여 통찰력 있게 꿰뚫어 보시고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을 복주시고, 악한 사람은 벌을 주심으로써 역사를 주관하시고, 당신의 도덕질서를 확보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르칩니다: “그분의 눈이 보지 못하여 축복이나 벌을 받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선행이나 잘못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경외하여 선행, 특히 따뜻한 말을 건네시기를 바랍니다. ” 따뜻한 말은 생명나무와 같지만, 가시돋힌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 (잠15:4).

잠언 15:4절
“따뜻한 말(혀)은 생명나무와 같지만, 가시돋힌 말(혀)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
.”(새번역)

본문은 ‘말’과 관련된 단락을 끝맺음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2절에 이어 다시, ‘혀’(말로 의역됨)가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잠언기자는 ‘혀’의 힘에 주목하면서, 언어사용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 잠언은 제자들이 기억하기 쉽게 대조법을 사용합니다: ‘따뜻한 말’과 ‘가시돋힌 말’/ ‘생명나무’와 ‘마음을 상하게 함.’ 특히, ‘생명나무’라는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그 나무는 에덴 동산에 있었고 사람이 먹으면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따뜻한 혀’는 생명나무입니다. 그 ‘혀’에서 나오는 말은 생명을 주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언어가 아니라, 치유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모든 관계가 깨어진 세상을 낙원으로 회복시키도록 제자들의 ‘식욕’을 돋우고 있습니다. 이 반면 가시돋힌 말을 쏟아내는 패역한 ‘혀’는 아담에게 사망을 가져온 선악의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 ‘혀’에서 나오는 말은 저주를 담아 죽음을 선사합니다. 따뜻한 말은 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에 반하여 가시돋힌 말은 인간이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도덕질서를 포함하여 진리를 왜곡하거나, 전복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혀는, 악한 자들의 혀에서 나오는 죽음의 과실을 먹고 상처받은 심령을 치유하는 양약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 가운데 보이지 않게 존재하시면서,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 사람인지를 관심을 가지고 평가하십니다(3절).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잘 들어라.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다”(마12:36, 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