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50편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니,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에게, 내가 나의 구원을 보여 주겠다”(23절)
본 시의 배경은 온 ‘세상(1)’이 하나님 앞에 소환되는 심판의 날입니다. 특히 언약 백성 (4, 5)이 하나님의 심판 (6) 앞으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 종류입니다: 종교 의식을 사랑하지만 감사와 순종과 기도를 를 무시하는 사람들 (8)과 율법을 암송하지만 지키지 않는 사람들 (17-21). 이 시는 이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돌이켜 감사와 바른 행동을 요구하며 끝을 맺습니다(22,23). 중심 단락(7~21)은 희생과 피의 의식(4~6)이 율법 낭독(vs 7, 8)을 수반하는 출애굽기 24장 3~8절의 언약식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개개인의 자기성찰을 위한 틀을 제공함으로써 언약을 갱신하는 축제에 매우 적합합니다. 한편, 본 시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게 합니다(마25:31-46). 주님이 다시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그 앞으로 모든 민족을 불러모아 이른바 양과 염소로 상징되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정통 교리를 고백하는 신자들입니다. 양으로 상징되는 사람들(‘의인’으로 기록됨)에게는 영생을 염소로 상징되는 사람들에게는 영벌을 선언하며 그 이유로 당신에게 선행을 하였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놀라나 주님은 ‘여기 있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한 명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배와 사랑의 실천 모두 잘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3:14)
시편51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17절,새번역).
이 시는 유명한 다윗의 참회시로서 사무엘하11, 12장이 배경입니다. 의로운 왕 다윗은 밧세바를 불러 간음죄를 저지르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남편 우리야(헷 족속임)를 죽이도록 사령관 요압에게 지시합니다.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후 일년 이나 다윗은 위선 속에서 살아갔으나 어느날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다윗은 즉시 자백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삼하12:13) 이때 나단은 하나님의 용서를 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히4:12-13). 우리가 특히 생각할 점은 모세 율법은 살인죄와 간음죄를 용서할 규정을 두지 않고 있기에, 제사와 번제는 오직 용서를 받은 후 감사와 헌신의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죄의 용서는 용서의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만 가능하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날 억울하게 가정을 빼앗기고 살해당한 이방인 우리야는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호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공의롭게 답변하셔야만 합니다. 다윗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택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사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마1:21). 한편, 16-19절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회개하여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되며,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자신의 삶의 근거로 삼고 예배를 통해 그분을 기쁘시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24:47).
잠언14:35절
“슬기로운 신하는 왕의 총애를 받지만,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신하는 왕의 분노를 산다”(새번역)
통찰력은 현명한 자의 자질이며 수치는 어리석은 자가 선택한 결과입니다. 왕(의로운 왕임)이 슬기로운 신하를 총애한다는 말은 그 신하의 통찰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통찰력 있는 사람은 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를 풀려고 할 때 도움이 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어리석게 행동하여 수치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신하는 그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는데, 이는 왕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은커녕 오히려 심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왕을 한 조직체의 리더로, 신하를 구성원으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이 잠언은 지금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말년에 사독과 아비아달 두 명이 통일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 시, 두 사람은 일치하게 다윗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차기 왕을 보는 안목에서 두 사람은 달랐습니다. 사독은 솔로몬을,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지지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파직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사독을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그 후손은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까지 천 년 간 제사장직을 수행하였습니다. 한 번의 판단이 천 년 간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잠언을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가장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자이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슬기로운 자들입니다. 그 결과는 천 년이 아니라, 영원까지 미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잠언 15:1절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새번역)
본 잠언은 전절(14:35)의 의미를 보충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관리들이 부드러운 대답을 함으로 왕의 분노를 가라앉히도록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 왕은 무능한 관리에 대하여 분노하더라도, 거친 말을 삼가서 파괴적인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 잠언은 이렇게 상반되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독자들이 감정을 통제하여 부드럽고 온유한 반응을 보여야지 거칠거나 면박을 주는 독한 말을 사용하면 안되겠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 절제라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절제는 폭발할 경우 사회적 관계를 깨뜨리는 어리석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절제가 있어야 비로서 부드러운 언어가 나올 수 있고, 부드러운 말은 상처입고 멍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올리브 기름과도 같습니다. 이 반면 톡 쏘는 말, 거친 말은 불에 쏟는 기름도 같으며, 대개 교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쉽사리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600명의 군사들과 피신생활을 할 때 부자 나발에게 필요한 식량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거칠고 교만한 말로 거절하여 다윗의 분노를 격발하였습니다. 격분한 다윗은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안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은 급히 포도주와 식량을 준비하고 다윗을 마중나가 엎드려 절하며 지혜롭고 부드러운 말로 보복적 학살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녀의 지혜있는 말에 다윗은 설득당하여 돌아갔습니다. 한편 나발은 아무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해 즐거워하였으나, 이튿날 보고를 듣자 낙담하여 돌처럼 굳어졌고 결국 얼마 후에 죽었습니다(삼상25장).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좋은 지식을 베풀지만,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은 말만 쏟아낸다.”(잠언15:2, 새번역).
잠언 15:2절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좋은 지식을 베풀지만,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은 말만 쏟아낸다.”(새번역)
본 절은 1절의 주제인 좋은 ‘대답’ 대 나쁜 ‘말’의 도구가 ‘혀’와 ‘입’이며, 원천은 인격임을 언급합니다. 인격은 ‘지혜롭다’ 혹은 ‘미련하다’고 분류되는 개인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지혜자는 ‘지식’을 아름답게 치장(혹은 매력적으로 만들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탈쿰역은 ‘지식을 즐겁게 하다’로 번역합니다. 그들은 사랑과 건전한 생각 안에서 혀를 사용하기에, 그들의 마음에 이미 내면화된 도덕질서에 대한 ‘지식’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질서에 내재된 원인과 결과를 깊이 통찰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구원하고자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친절하고, 민감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말하게 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련한 자는 절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열정적으로 쏟아내어, 인격의 거만함을 드러내고 결국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말게 됩니다. ‘갑’과 ‘을’은 한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갑’이 사이비 교리를 듣고 혹하여 ‘병’을 열심히 따라 다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중단하겠다는 마음을 ‘을’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미 그런 경험을 한 ‘을’은 “그만 둘 때, 분명 ‘병’이 당신에게 포학한 말을 할 것이나 겁먹지 말아라”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갑’이 그만두겠다고 하니, 아니나 다를까 ‘병’은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미 ‘을’의 말을 들은 그는 ‘아, 이단과 사이비에 속한 사람들의 인격은 다 이렇구나’ 하고 냉큼 그만두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늘 주님을 경외하여 경건한 언어사용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눈은 어느 곳에서든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모두 지켜 보신다.” (잠언15:3,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