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48편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시편46편, 47편, 48편은 모두 구원받은 후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46편은 위협이 제거되었다는 것에, 47편은 복종된 이방민족들도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리고 48편은 심히 위태로웠던 시온 성(=예루살렘 성)의 안전한 보존에 각각 초점을 두었다는 점입니다(12, 13). 본 시편의 구조입니다:
A 우리 하나님은 위대한 왕 (1–3)
B 그 위대한 왕의 능력과 구원( 4–11)
A′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 (12–14)
이 시의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유대 왕 히스기야 시대(BC 700)의 앗시리아 침공과 하룻 밤 사이에 전멸된 앗시리아 군대를 떠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앗시리아 제국 수십만 명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으나, 화살 하나 쏘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단 한 명의 천사에게 전멸 당하여 퇴각하였습니다. 그때 시온 성은 돌 하나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되었고(11-13), 주님의 명성은 땅 끝까지 퍼졌습니다(10). 그러나 이 시온 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한 표상일 뿐입니다(히12:22). 왜냐하면 시온 성은 유대 백성의 불순종으로 멸망 당한 지 2천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과거 시온 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는 진정한 시온 성에 이미 들어 간 우리들을 ‘죽을 때까지”는 물론 영원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심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시편49편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사망이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우리의 인도자로 신뢰할 수 있는가의 질문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본 시편 15절은 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구약 성도들은 죽음 이후의 소망이 없었다고 주장되나(근거: 시편6:5 등), 이런 구절들은 시편 기자의 특별한 경험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하에 죽어간다고 – 올바른 생각이건 아니건 간에 – 생각한 사람의 말입니다. 본 시편은 분명하게 사망의 두 측면을 말합니다: 소망 없는 죽음(13,14)과 소망으로 가득찬 죽음(15). 존귀에 처하지만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 인간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죽거나(12,20), 아니면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붙잡아 소망 가운데 죽거나(15,20) 양자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죽음(스올)은 영원한 심판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본 시편 1-4절에서 시편 기자가 풀어보라고 던진 우주의 수수께끼의 답이며, 요한복음5장28-29절에서 상론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는 인간의 죄악은 너무나 중해서 그 죄를 속할 수 없습니다(6-8). 더구나 부를 자랑하는 자들은 자신의 부에 취하여 속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9-11). 성도 여러분 부족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도착되어진 것들에 만족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늘 돌보아 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신 아버지께 항상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말을 기뻐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시편49:12,13, 새번역).
잠언14:32절
“악한 사람은 자기의 악행 때문에 넘어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음이 닥쳐도 피할 길이 있다.”(새번역)
본구절은 15절에서 시작된 단락의 결론입니다.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사람과 반 사회적 행동을 하는 사람 간에는 전혀 다른 운명이 찾아오며, 이는 주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공동체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이웃에게 선을 행하거나 최소한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웃을 모해하거나, 까닭 없이 다투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3:29-31). 만약 이를 위배하여 악을 행하면 이웃을 해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 해가 자신에게까지 미치고, 결국 그 사람은 넘어져 파멸됩니다. 왜냐하면 유리그릇이 단단히 고정된 선반 위에 놓여졌을 때는 안전하였지만, 고정시킨 나사가 풀려진다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는 평강도 피난처도 없습니다. 이 반면, 의인은 죽음에 이르러도 피난처가 있습니다. 그 피난처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주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그는 죽으면 에덴 동산(낙원의 상징)에 간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전형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범죄자와 같이 처형을 받는 수모와 고난을 겪었지만, 당신의 영혼을 피난처이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시는 것은 물론, 함께 못박힌 한 강도에게 그가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악이나 선에 대한 보상 모두 죽음을 넘어 영원까지 영향을 미치며, 이를 심판하실 분은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이 지혜의 출발점입니다 (행17:31). “바른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지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멸한다” (잠14:2,새번역).
잠언14:33절
“지혜는 슬기로운 사람의 마음에는 간직되지만, 심지어 어리석은 사람 중에서도 알려진다”(쉬운성경)
33절 후단의 번역은 여러 가지이나 쉬운성경이 문맥과 잘 어울려서 그것을 채택하였습니다. 여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분별력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덕질서를 깨달은 현자의 가르침을 믿기 때문에, 상황과 그 결과를 꿰뚫어 보고 통찰한 바를 수행합니다. 지혜는 내적 자질로서 마음에 머무릅니다. ‘머물고 – 누아’는 최종적 승리, 구원의 색조를 띠면서 특정 장소에 평화롭게 정착한 삶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들은 마음에서부터 지혜롭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마음으로 결말을 보고 시작하기에 승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성문광장에 있는 수 많은 바보들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들은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표현은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지만, 아무런 흥미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지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추구하기에 아름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종종 지혜를 여성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편, “간직된다”는 것은 지혜가 마음에 들어가 정착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보들은 거만하며 고집스럽기 때문에 지혜를 듣고 보지만 그것을 간직하여 삶의 지침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잠언은 지혜를 깨달은 현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을 넘어 자신의 교훈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정착하고 그들의 삶을 지배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지혜의 정수인 복음에서도 참되어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간직한 자들로 정의되는 것입니다.“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
잠언14:34절
“정의는 나라를 높이지만, 죄는 민족을 욕되게 한다”(새번역)
이 잠언은 지혜(33절)를 윤리와 동일시 하고 개인에서 국가차원으로 높여 적용합니다. 또한 교차대구(chiastic)라는 구조를 사용하여, 지혜를 따라 살아야만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국가라도 하나님의 도덕 기준에 맞게 살아가야만 하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함으로 이웃 국가나, 공동체 자체를 해롭게 하면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고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요사이 중국이 행하는 행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인당 소득 1만달러와 국가 GDP가 미국의 70%에 이르게 되자, 교만하여 중국의 힘을 과시하고, 중국의 야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변국가 중 중국을 좋아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잠언의 말대로입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중국 민족 자체를 욕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길은 개인이나 국가 모두에게 참된 것입니다. 실로 국가 흥망성쇠의 궁극적 요인은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 힘이 아니라 그 민족의 경건과 윤리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역사를 잘 보면 죄된 민족은 조약을 깨뜨리고,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속임수를 베풀고, 약자를 억압하는 깡패와 같은 짓을 하였습니다. 또한 안으로는 사법적 정의를 파괴하여 범죄자와 게으름뱅이들이 보답을 받고 선량한 시민들은 과중한 세금부담을 지고 두려워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는 교육에 있지만, 그 이전에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할 수 없는 교회의 사명입니다.”나 주가 선고한다. 가사가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사로잡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다가, 에돔에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암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