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6
시편44편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22절; 롬8:33절에서 인용)
이 시는 고라 자손의 교훈시이며, 지휘자의 지도로 연주된 민족적 탄원시입니다. 주제는 급박한 위기에서 국가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의 배경으로 앗시리아 산헤립의 재차 침입으로 멸망의 위기에 놓인 유대 히스기야 왕 때로 추정됩니다(BC 701년). 시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A1 (1–3) 과거의 하나님
B1 (4–8) 증거- 진실한 믿음
C (9–16) 탄식- 비탄스러운 현재
B2 (17–22) 증거- 올바른 행동
A2 (23–26) 미래의 하나님
시편 기자는 먼저 과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확인한 뒤(1-3), 이를 근거로 새로운 믿음의 결단을 내립니다(4-8). 그러나 현실은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고 민족은 멸망 직전에 있음을 탄식합니다(9-16). 그렇다고 유대민족이 불신앙 가운데 행하지는 않았습니다(17-22). 시인은 신속한 구원을 탄원합니다(23-26). 하나님의 길은 신비스럽습니다. 인생에 닥치는 고난은 종종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며, 과거에 하나님 자신이 확립한 방법과 모순된 것처럼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때는 하나님께 달려가 기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히스기야는 이사야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였고, 그 응답으로 주의 천사가 내려와 산헤립의 군사는 밤사이에 18만 5천명이 죽었습니다. 앗시리아는 당연히 퇴각하였고 유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2021/9/7
시편 45편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4)
이 시는 제왕시로서 왕의 결혼식 축가이지만,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하나님과 이스라엘(신자)의 언약적 삶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왕국 내에서 삶의 질서는 하나님만이 왕이며, 지상에 있는 다윗 왕과 그 후손은 단지 그분의 뜻을 집행하는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하나님이 임명한 지상의 통치자에게 바라는 그분의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4절이 대표적). 먼저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A 도입부(1)
B 왕에게 드리는 헌사(2-5)
C 신랑의 영광(6-9)
B1 신부에게 드리는 헌사(10-15)
A1 결론(16-17)
히브리서(1:8)는 이 시(특히 6절)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다윗과 그의 후손들이 표상하는 진정한 실체로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크리스마스는 위대한 용사요 위대한 왕과 진정한 신랑의 도착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그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시기에 그분의 피로 씻어 하나님의 자녀를 탄생시키고 계십니다(시45:16; 요1:12,13). 그러므로 신약은 결혼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신부인 교회의 결합임을 가르쳐줍니다(엡5:31-32). 이렇게 시편은 역사상 이스라엘 왕의 결혼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하나,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에 귀착하는 다층적 의미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19:7)
2021/9/8
잠언 14:26절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안전한 요새가 있으니 이것이 그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될 것이다.”(현대인의성경).
이 잠언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오는 은택을 보도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주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존경과 두려움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온 천지를 창조하신 만유의 주님으로서 화와 복의 궁극적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늘 주님의 보호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런데 후단은 더 나아가, 주께서 보호하신다는 약속이 자녀들에게까지 미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주님을 두려워한다면, 어떤 것도 혹은 어떤 사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물론 그의 자녀들에게도 만유보다 크신 주님이 그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피난처’란 단어는 ‘자연, 제도, 혹은 사회에서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피난처에 대한 언급은 시편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특히 시편25편). 또한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와 ‘그의 자녀’들을 ‘안전한 요새’ 및 ‘피난처’와 관련하여 그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의 자녀가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며 살 때 그들에게 안전한 요새가 있으며, 그들의 부모는 거기에서 피난처를 발견한다.” 본 잠언의 취지는 그대로 신약의 구원관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지진과 기적을 경험하고 두려워 하여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할 때 사도 바울께서 그 구원이 가족까지 미침을 말한 것입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16:31).
2021/9/9
잠언14:27절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
‘주님을 경외하라’는 주제는 26절에 이어 계속됩니다. 특히 이 잠언은 13:14절,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과 비교하면,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이 ‘주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결국 ‘지혜자의 가르침’이나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나 ‘주님의 계명’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생명의 샘….. 죽음의 그물’이라는 비유를 계속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경외심을 갖고 주님의 계명과 지혜자의 가르침을 숙고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권면을 듣고 행하면 풍성한 삶(27a)을 누리고, 그들과 다른 이들을 죽음에서 건지는 길(27b)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어렸을 때 삼촌 부부를 따라 런던에 있는 햄프톤 법원의 유명한 미로에 구경을 갔다가 도저히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해 벤치에 앉았습니다. 이미 경험이 있는 삼촌은 근처의 벨을 눌러 안내원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곧 안내원이 나타나서 “길을 잃었습니까? 나를 따라오십시요!”하고는, 앞장 서서 나갔습니다. 그를 따른 일행은 곧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 미로보다도 너무나 복잡하고 곳곳에 죽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 가면, 다시 말하면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지혜로운 사람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모든 죽음의 함정을 피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 생명의 샘을 마실 것입니다. ”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2021/9/10
잠언14:28절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지만, 백성이 적은 것은 통치자의 몰락이다.”(새번역)
모든 사람 위에서 통치하는 왕은 특히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는 왕국의 제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고 정의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이런 것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그 중심을 이룹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의 판단은 한 방향으로 쏠리게 되어 신하나 백성의 지지는 줄어들고, 결국 사회적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중국의 전국 시대를 보면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백성은 몰래 그 나라를 떠나 좀 더 나은 국가를 찾아 갔고, 그 나라의 국력은 쇠퇴하여 몰락하였습니다. 여기서 ‘왕’이란 리더의 한 모형입니다. 사실 이 잠언은 제자가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신뢰받는 지도자로 우뚝서야지, 백성이 떠나는 종류의 리더가 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유능한 왕은 믿음직하면서도 인자하며(20:28), 정의롭고(16:10), 공정하고(16:12), 참되고(16:13), 마음이 청결하고 은혜로우며(22:11), 분별력이 있고(25:2), 헤아리지 못하게 하는 지혜(25:3), 악인들을 심판하고(20:8), 술에 취하지 않는 건전한 마음(31:4) 같은 자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왕은 당당하게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지만(30:31), 르호보암이 배운 것 같이 백성의 지지를 잃어버리면 좌초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 셀 수 없는 거룩한 성도들이 하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장면은 분명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계7:9,10). 그러나 본 잠언은 주님의 면전에서는 사람의 숫자는 가치가 없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균형을 이뤄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시3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