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30
시편42편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절)
시편 제2권은 총 31편(42-72편)의 시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성전 찬양대인 고라 자손들(42-49), 성가대장 아삽, 다윗, 솔로몬, 기타 무명의 시인들입니다. 먼저 42편과 43편을 보면, 이 두 시는 사실상 잘 짜여진 하나의 시입니다. 시인은 팔레스틴 북단으로 사로잡혀 갔으며(42:6), 포로에서 풀려 하나님의 전에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 성가대원입니다. 그는 이런 열망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소망 속에 탄원의 기도로 표현합니다. 시의 구성입니다:
42:1-5 잃어버린 과거/ 6-11 고난 많은 현재/ 43:1-5 기대되는 미래
시인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과 같이 큰 시련을 당해 도움을 위해 하나님을 찾았지만(42:1-2), 응답은 신속히 오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며 조롱하였고, 시인은 매우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격려하면서,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11). 신자의 믿음과 인내가 여기 있습니다. 신자는 영원을 위한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늘 주님께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고난 속에 있으면 흔들리기 쉽습니다. 본 시편기자는 이런 두 측면을 깊이 체험하고 있으며, 그것이 모든 신자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과부와 재판장 비유에서 주님은 신속한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난에 처할 때 우리 마음은 이 약속에 닻을 내려야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2021/8/31
시편43편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비록 고난의 폭풍은 잦아들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점점 커지고 있는 모습이 42편 내내 나타났습니다. 43편은 그 과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정도까지 시편기자는 낙담하였습니다(2,5).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태도는 긍정적인 기도로 대체됩니다. 먼저 시편기자는 “나를 변호하여 주십시오”(1)라고 호소함으로 좀더 현실적인 간구를 드립니다. 그리고 밀어닥친 어두움과 불안정한 삶은 긍정적인 요청, 즉 빛과 진리(예, 하나님의 신실하심)를 간구함으로 쫓겨나간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3). 하나님의 빛과 진리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곳으로부터 성전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주십사 하는 간접적인 호소가 3절에서 드러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주어진다면, 시인은 비록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팔레스틴 북쪽 극단에 포로로 있지만, 주님의 거룩한 산과 제단의 그 축복을 경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3,4). 그리고 이미 42:5, 11에 등장하고 세 번째 43:5에서 나타나는 후렴은 시편기자가 가지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국에 있건 포로로 잡혔건 간에, 그는 ‘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도움이 아니라 그분의 ‘구원’ 때문입니다(5). 하나님은 그의 ‘구원자’라는 믿음 때문에 외적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시편기자는 승리를 바라보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드리는 밤의 노래는 이런 소망에서 나옵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시43:5,새번역).
2021/9/1
잠언14:23절
“모든 수고에는 이득이 있는 법이지만, 말이 많으면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이 잠언은 열심히 일한 경우와 수다스럽기만 하는 경우의 결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선을 계획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들은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흘린 땀 때문에 비용을 제하고도 이득이 남는 자들입니다. 이어 대조적으로 말만 많고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놀랍게도 삶이 피폐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득’이란 히브리어 원어는 ‘몰타르’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말이 많으면’의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입술의 말들’로서, 입술만 수고하여 나오는 ‘말(word)’이란 의미입니다. 확실히 몇몇 잠언은 말을 많이 하지 말 것을 권면하면서 수다스러움을 책망하고 있으나, 이 반면 많은 구절에서 ‘말(word)’은 힘이 있다고 교훈하고 있기 때문에(예, 14:25), 어느 잠언을 적용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이렇게 잠언의 가르침을 선택하여 적재적소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혜라고 하며, 선택의 기준은 주님을 높이고,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지 여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헛된 수고는 입술만 움직여서 나오는 빈 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썩어질 세상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물질적으로 유복할 수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난해질 것이며, 마지막 날 주님과 결산시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게 다루는 법을 배워가야만 합니다. 이 과정은 믿음의 삶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2021/9/2
잠언14:24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18절에서 언급된 면류관은 본절에서 다시 등장함으로, 우리는 도덕적 행위가 반영된 지혜로운 처신의 결과를 배웁니다. 본절은 20절에서 시작된 부와 빈곤의 주제를 계속 다루면서, 23절에서 근면성실하게 일하여 얻은 이익(재물)을 면류관이라고까지 높여줍니다. 이렇게 양 구절을 함께 보면, 게으른 수다장이는 미련한 자들을, 근면한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면류관이라 함은 하나님이 보여주는 호의의 표지입니다(4:9;12:4). 지혜로운 자에게 하나님은 재물을 주심으로 그들이 중요한 사회적 신분, 품위, 권한을 갖게 하는 한편, 위협에 대처할 수 있게 능력을 주십니다. 물론 주님의 제자들은 부를 신뢰하지 말아야 하고(10:15; 11:28), 악한 행동에 의해서도 재물은 획득될 수 있지만,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지혜롭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재물을 주심으로 보답하심 역시 사실입니다(3:16; 22:4). 그러므로 한 쪽에 치우친 해석으로 큰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이란 도덕적 진리에 둔감한 사람들이 가지는 도덕적 오만함으로 이것은 정말 다루기 힘듭니다. 그들이 행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타인의 마음과 삶에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은 물론, 부메랑과 같이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어리석은 자’라는 불명예를 소유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지혜의 왕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오만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여 10지파를 잃어버리고 겨우 유다지파 하나만을 소유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잠언14:18)
2021/9/3
잠언 14:25절
“증인이 진실을 말하면 남의 생명을 건지지만, 증인이 위증을 하면 배신자가 된다”(새번역)
14:25-32절은 마지막 단락으로, 생명 혹은 사망의 문제를 다룹니다. 25절은 그 첫번 째로 법정에 선 정직한 증인과 거짓 증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본절과 5절은 비슷하지만, 본절은 증인의 성품 보다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진실한 증인은 용감하게 양심을 따라 말하여 속이지 않지만, 위증자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무죄한 자가 벌받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율법은 두 명 혹은 세 명의 증인의 증언이 있어야 비로서 유죄를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5).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위증 사례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원을 넘기기를 거부하자 왕 아합은 몸져 누웠습니다. 이를 본 왕비 이세벨은 나봇이 사는 성읍의 장로들에게 왕명으로 거짓 증인을 둘을 세워 나봇을 처지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장로들은 그대로 행하여 나봇의 일가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왕상21장). 그 심판은 약 20년 뒤 군대장관 예후의 반란으로 아합의 손자 때에 집행되었습니다(왕하9-10장). 거짓이 증인과 결부되면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데, 하물며 거짓 예언과 가르침은 그 폐해가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과 사도들은 이런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현재 대한민국에도 많은 거짓 예언자, 거짓 선생들이 나와 있습니다. 마땅히 분별이라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는가를 시험하여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일4:1,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