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8/23-27)

2021/08/23
시편41편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재난이 닥칠 때에 주님께서 그를 구해 주신다.” (1절, 새번역)

이 시는 죄, 질병, 적의, 소외, 은혜의 주제를 담고 있어, 시편38-40편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큰 질병 중에 당한 악의와 배반은 왕 다윗에게 고뇌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고치시는 주님은, 죄를 고백하는 다윗을 고쳐주셨고 원수들에게 왕으로서 정의를 행하도록 은혜 내려주셨습니다(10). 이는 다윗이 어느 상황에 처해서나 신실하게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12). 본시의 구조입니다.
 1–3 (A1)원리적인 주님의 은총/ 4 (B1) 범죄시 추구되야 할 은혜 / 5–9 (C)미움, 거짓, 수군거림, 배반 / 10 (B2)원수와 관련된 은혜/ 11–12 (A2) 경험된 주님의 은총

한편, 1절의 단어 ‘복-에쉐르’은  시편1:1절에도 등장합니다. 거기서는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주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이 반면 41: 1절에서 복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돌보는 사람으로서, 적극적인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흘러나오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게 되고, 완성됩니다. 이렇게 시편의 첫번째 책 총 41편의 시들은 ‘복’으로 시작해서 ‘복’으로 맺고 있습니다. 이 복이 우리 것이 되어야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2021/08/24
시편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본 구절에서 ‘가까운 친구’의 히브리어 원어는 “샬롬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인간에게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은 자신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배신자는 친구는 물론 심지어 형제나,  자녀나, 부모일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인생에서도 평범한 친구들이었으나, 자신이 조그만한 지위와 권력 그리고 돈이 생기자 그만 목이 뻣뻣하게 나오는 사람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외가 없었습니다. 마음에는 내심 몹씨 섭섭하고 불쾌하였지만, 만약의 경우 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는 생각에 두려움도 느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 중 하나이기에, 인간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루시퍼를 천사장 중 하나로 창조하셨지만, 그는 반역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다윗 역시 믿었던 자식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년에 심한 내란을 겪었고, 헷 사람 우리아는 믿었던 왕 다윗으로 인하여 가정이 빼앗겼고, 믿었던 상관 요압은 왕 다윗의 지시를 우선시 하여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이 모든 것 중 백미는 가룟 유다가 은 30량에 주님을 팔아넘긴 사건으로 주님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오늘 본문을 인용하심으로 경고하셨습니다(요13:18). 그러나 유다의 배신을 미리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가룟 유다를 열 두 제자 중 하나로 선택하셨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요6:70,71). 즉, 배신당할 수도 있지만, 사랑을 주는 것 역시 철회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어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2021/08/25
잠언 14:20절
“가난한 사람은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지만, 부자에게는 많은 친구가 따른다”(새번역)


이 잠언은 ‘악인이 선인(의인) 앞에 엎드린다’는 19절의 가르침에 악인이라도 잠시 동안은 부자가 될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절의 본지는 가난한 자가 당하는 사회적 관계의 빈곤을, 부자가 누리는 사회적 이득과 대조하면서, 인간 본성에 관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재물을 충분히 소유하나 도덕적으로는 빈곤한 부자와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는 빈곤하나 도덕적으로는 결코 결핍된 존재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가난’과 ‘부’ 말들은 극단적인 물질적 결핍과 유족함얼 뜻하지만, 전자는 역시 사회적 관계, 예를 들면 친구들 -에서도 빈약함을, 이 반면 후자는 가까운 친구들이 많음을 보여줍니다. 더 슬픈 것은, 사람들은 가난한 자의 미덕들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내고자 하는데, 이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즉 자신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 하지만, 아무 것도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탐욕스러운 인간 본성의 어두운면을 드러 내면서, 이 잠언은 ‘가난과 부’ 모두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전자는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후자는 잘못된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로서, 주님 안에서 보다는 인간들을 의지해서 삶과 존재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로써 20절은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어떤 면에서 독특하고, 좀 열등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접하여야 올바른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7:12,새번역)


2021/08/26
잠언 14:21절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새번역)

20절을 뒤이어 기록된 21절은 20절의 본지를 잘못 이해하여, 가난한 이웃과 거리를 두려는 부패한 마음을 경계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실로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 죄는 거만의 죄요,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을 모두 지으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입니다. 이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자신의 이웃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로 여기고, 따뜻하게 영접하여 친절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호의에는 불쌍함, 자비심 그리고 관대함 등의 요소가 작동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지 강요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호의를 가지고 혹은 은혜롭게 대하다’ 는 말은 가난한 자를 돕고, 배고푼 자를 먹이고, 패배와 죽음 등으로 고뇌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잠언이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현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주님으로부터 받을 칭찬에 대한 기대 때문에, 겸손하면서도 무척 즐거워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이런 행복한 미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잠언은 제자들에게 몰인정하고 거만한 태도를 삼가고, 친절하게 대하여 주님의 인정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이웃을 따뜻하고 품위 있게 대하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겸손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   


2021/08/27
잠언 14:22절
“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새번역)

본절의  표제어 ‘선’ 과 ‘악’은19-22절의 단락을 끝맺음 하면서, ‘은혜’와 함께 하나님의 성품(21)에는 인자(kindness)와 진리(faithfulness)가 있음을 교훈합니다(출34:6). 더구나, 22절은 이웃을 경멸하는 자는 그 이웃에게 악을 꾀하는 자로, 호의를 베푸는 자는 선을 계획하는 자로 변화되어감을 지적합니다. 그런 죄인은 구원의 소망 없이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되고, 선인은 도움을 요할 때 사람들, 특히 주님으로부터 인자(친절)하심을 경험합니다. 한편, ‘악을 계획하는 사람’이란 마치 능숙한 장인들과 같이 해악이라는 재료를 외견상 도덕행위와 결부하여 “경멸”이라는 악의 작품을 만드는 자들을 비유합니다. 여기서 “길을 잘못 간다’는 의미는 악을 계획하는 자들이 길을 잃어 버려 방황하다가 죽음을 만나는 운명을, 주님을 경외하여 바른 길로 걸어가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만나는 축복을 묘사합니다. 결론적으로, “악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kindness)를 경험해도 오히려 죽음의 길로 가지만,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아 구원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주님의 많은 친절과 인자를 경험 하였지만 돌이키지 않고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요셉입니다. 그는 고난 가운데서도 보디발, 간수, 관리 및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위해 선을 계획함으로, 그들로부터 인자와 진실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법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빌1:11,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