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6
시편40편 – 내용과 구조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복되어라.”(4절, 새번역)
다윗은 38,39편에서 죄와 질병과 원수들의 준동 속에서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본 시편에 이르면 주님을 기다린 다윗의 승리의 외침이 울려퍼집니다. 이제 그 기다림은 끝이 났고(1-3), 그의 신뢰는 올바른 행동이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4-5).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다짐하며(6-8) 많은 회중 앞에서 체험한 구원을 증언하기로 약속합니다(9-10).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주님의 도우심(11-13), 원수들에 대한 심판(14-15), 주님의 백성을 돌보시기를 기도합니다(16). 왜냐하면 다윗 자신은 산적한 어려움을 해결하기에는 연약하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심판과 구원을 베풀어 주실 주님을 또 한 번 기다리게 됩니다(17). 이런 다윗의 삶의 패턴은 그대로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의 본질은 기다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유의 주님을 의지하며 충성되게 사는 신자들은 실로 복이 있습니다. 이 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A1 열매 맺은 기다림(1-3)
B1 과거에 행하신 주님의 행동(4-5)
C 지극히 중요한 마음의 모습들(6-13) – 순종,선포,겸손
.B2 미래에 행하실 주님의 행동(14-16)
. A2 또 기다림(17)
한편, 히브리서는 6-9절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내일 묵상해보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편40:7; 히10:7).
2021/08/17
시편 40: 6-8절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7절)
하나님이 베푸신 큰 은혜를 체험한 다윗의 귀에(5)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도 않고,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도 않는다”(6)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형식적인 제사 즉, 계시된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예배는 헛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성소에 이르러-‘내가 왔나이다’-, 자기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겠다는 각오를 말씀드립니다. ‘두루마리 책’은 모세 율법을 뜻하며, 모세율법은 하나님을 세상의 유일한 왕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조차 그분의 뜻을 행하는 신하에 불과함을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분이 두려워서만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기쁘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8) 외친 것입니다. 이는 중생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헌신을 위한 맹세는 할 수 있지만, 이를 신실하게 실천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실 분은 메시야이외에는 불가능합니다. 이를 근거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0:5-10절에서 시편40:6-8절을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세상에 들어오실 때 하신 말씀으로 재해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희생 제사 의식이나 율법이 규정한 의 자체가 성취된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인간 구원을 위한 새 언약과 새 제도를 세우실 수 있었습니다(히10:9)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2021/08/18
잠언14:17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일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
잠언은 계속해서 어리석음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여기 두 종류의 바보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개적으로 성을 내어 타인을 해롭게 하거나(술 취해서 고성방가하는 사람), 그런 분노를 참고 은밀히 계획을 세워 타인을 해치는 사람입니다(암살자). 먼저,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됩니다. 주전자가 끓으면 옆으로 넘치게 되는 것과 같이, 훈련이 안된 그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머리가 분노로 뜨거워 졌을 때 그의 판단력은 흐려져 있고, 그 가운데 내린 결정은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게도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부드러우면서도 지혜 있는 말로 진정시켜야만 합니다(15:1, 29:8). 실상 지혜의 이상적인 모습은 분노 가운데서도 실수하지 않는 침착한 사람입니다. (잠16:32). 대조적으로 냉철하게 계획을 세우는 자는 훈련되어 있고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합니다. 그 결과 그는 통찰력 있게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합니다. 문제는 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혜자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지만, 악인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미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잘못된 일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자는 비밀리에 우회적으로 범죄를 행합니다. 이들은 모두 타인과 자신들을 해롭게 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이며, 이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나 공동체에 의하여 버림받게 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2021/08/19
잠언14:18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이 잠언은 두 종류의 사람을 묘사합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슬기로운 사람. 여기서 ‘어리석은 사람’은 히브리어 ‘페티’로서 15절에서는 모든 사람의 말을 다 믿는 ‘어수룩한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별 생각 없이 단순하게 반응하는 사람(simple-minded)입니다. 이런 사람은 속기 쉽기 때문에, ‘어리석다(folly)’라는 불명예를 지울 수 없습니다. ‘어리석음’의 히브리어는 ‘이벨렛’으로 17절에서 화를 잘내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지만, 도덕적으로 오만하여 다루기 힘든 사람이 행한 결과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기업을 삼다’란 통상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재산과 사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 잠언에서는 풍자적으로 쓰여서, 어리석은 사람의 행위는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편, 잠언은 슬기로운 사람에 속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는 그들이 지혜자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지식들로 면류관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계시된 도덕적 진리들을 마음에 새겨 참된 지식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인생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과 위험을 뚫고 나아가서 드디어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존경을 받는 자들입니다. 캐나다에서 있던 일입니다. 선교사 출신의 한 사람이 검은 모래를 채취하여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그럴듯한 설명서를 가지고 투자를 받았습니다. 마을의 많은 사람이 그런 외형에 속아 투자를 하였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신중하여 직접 검은 모래를 채취한다는 장소를 가서 보고 사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큰 손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영광을 물려받고, 미련한 사람은 수치를 당할 뿐이다.”(잠3:35,새번역).
2021/08/20
잠언14:19
“악인은 선한 사람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사람은 의인의 문 앞에 엎드린다.”(새번역)
18절에서 지식으로 면류관을 쓴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개념은 본 구절에서 더욱 발전되어 선한 사람을 마치 왕에게 비유하고, 악인을 그 밑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양 구절의 주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 때문에 선한 사람(의인)과 연결되어 있고, 지혜의 가르침에 주목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악인과 불의한 사람들과 맺어집니다. 잠언 2:20절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와 같이, 악인은 불의한 사람과 같고, 선한 사람은 의인과 같습니다. 본 잠언은 공동체를 섬기는 자가 높아져 다스리고, 자기만 아는 사람은 종처럼 낮아져 그들 앞에 엎드린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침으로, 하나님과 이웃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의인의 문 앞에 엎드린다’는 말은 의인이 심판석에 앉아 정의를 집행함으로써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죄인을 벌한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예가 요셉을 노예로서 애굽에 팔아 넘긴 열 명의 형제가 20년 뒤 높아져 심판석에 앉은 애굽의 총리 요셉 앞에 와서 엎드린 사건입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 잠언의 이 교훈을 언제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밝혀지는 그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2:10,11절은 잠언의 이 가르침이 완전히 성취되는 날을 선포합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10,11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