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8/9-13)

2021/08/02
시편39편 – 총괄
“가슴 속 깊은 데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주님께 아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3절,새번역)

이 시는 하나님은 연약하고 덧없는 피조물인 사람을 부지런히 징계하시는 이유를 묻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시편38편과 비슷합니다: (1)방관자들 앞에 침묵을 지키는 모습(38:12, 13; 39:2), (2) 죄를 징계하시는 주님의 행동(38:1–3; 39:9–11), (3) 오직 주님만이 구원해 줄 수 있다는 소망(38:15, 21, 22; 39:7)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조점은 다릅니다. 시편38편에서 질병은 죄의 문제를 드러냈고,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이 반면 시편39편에서 질병은 인생이 짧고 덧없음을 절실히 알게하는 동시에, 현생에서의 행복한 삶 또한 소중하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인생무상이라는 개념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서, 불멸의 세계가 완전히 계시된 후라도 그런 개념이 남아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 삶은 귀중한 것이며, 인생에서 누리는 기쁨과 사랑들은 결코 대체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매우 근심하였고, 하나님께서 회복시켰을 때 “근심에 근심을 면했다”할 정도로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빌2:27). 다윗 또한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주님의 징계로 죽게 되었을 때, 결국 만나게 될 것을 알지만 아기가 죽지 않도록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삼하12:22-23). 지금은 자신의 남은 생애가 질병으로 단축될 수 있음을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12, 13).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며,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아, 건전한 지혜와 분별력을 모두 잘 간직하여 너의 시야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잠언3:21, 새번역).


2021/08/03
시편39편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11절)

이 시는 4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절 항의 / 4-6절 이 덧없는 인생 / 7-11절 엄중한 징계/ 12,13절 작은 간구. 오늘은 4-11절을 중심으로 묵상하겠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복잡하였지만, 그의 첫 기도는 인생의 본질을 깨닫도록 요청합니다(4). 그는 자신이 겪는 질병의 고통을 주님이 주시는 징벌로 받아 들이면서, 주님이 보시는 것처럼 자신도 볼 수 있기 위해 기도드립니다(4-6). 특히 ‘헛되다’다로 번역된 ‘헤벨 hebel’은 ‘입김’ 내지 ‘수증기’로서, 3번이나 사용되었고, 이를 통해 다윗이 배운 바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허사뿐이다’(5), ‘헛된 일로 소란하며’(6),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11절)(전도서의 주제임). 그런데 세 번째 단락(7-11)에 이르면 다윗은 욥을 괴롭힌 역설을 겪게 됩니다. 이들은 지상의 삶에도 최선을 다하지만,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한하고 덧없는 존재들에게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너무나도 심한 처우를 하시는 것 같아 탄식합니다. 그러나 모든 역설들과 같이 이것도 발굴되지 않은 보화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됨과 영원을 위해 지음받았다는 사실입니다(롬8:11-24). 좀이 아름다운 옷을 먹는 것과 같이 인간이 잘못하여 교만할 때 그 영화를 치심으로, 우리를 좀 더 완전하게 하여 영원을 함께 살아가시려는 주님의 거룩한 뜻입니다(물론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미함). 이 주제는 우리가 씨름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7절,새번역).


2021/08/04
잠언14:14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고, 선한 사람도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는다.” (새번역)

이 잠언은 ‘레브 – 마음’라는 단어를 통해 13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3절에서는 현재 보이는 겉모습들은 기만적이고, 참된 실체는 결론에 가서 드러남을 말하지만, 본 구절은 그 결론을 따른 마지막 보응을 논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을 따르는 현재의 아픔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음으로 살면서, 결국에는 주님께서 선을 행한 자를 상주시고, 악을 행한 자를 벌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겉모습이 어떻든, 행위와 운명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길-way’이라는 비유로 예증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본 잠언은 마음이 변하여 악을 행하는 비뚤어진 사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한 길을 선택한 후에, 신자는 인내하며 무조건 그 길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처음에는 사회나 이웃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고 살지만, 나중에는 그 길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을 위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이전에 무슨 선한 행위를 하였든지 간에 그들의 신실치 못한 행동에 대하여는 완전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자가 행한 선한 행위들 역시 그에 합당한 보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예레18:7-10). 이렇게 본 잠언은 비뚤어진(혹은 반역적인/왜곡된) 사람을 선한 사람과 대조합니다. 실로 악인은 자신이 기대한 만큼이 아니라 완전한 벌을, 의인 역시 완전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고백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롬다 하심을 받습니다만, 그 믿음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신실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25:46).


2021/08/05
잠언14:15
“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 (새번역)

본 잠언은 두 개의 기능을 합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걷고(1-7) 보이는 대로 걷지말라(8-15)는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또 하나는 지적-영적 성품을 대조하면서 교훈을 주는 단락(16-32)을 도입합니다. 이를 위해 ‘길’이라는 비유에 ‘걸음’이라는 비유를 더함으로 본 잠언은 제자를 잘못 이끌게 되는 어수룩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어수룩한 사람은 바보들의 일종으로 이들은 쉽게 속아넘어가지만, 신중한 사람은 드러난 겉모습을 믿지 않고 그 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는 자신의 걸음마다 성찰함으로써 자신이 가는 길이 참된 경건과 윤리에 일치하는지 여부를 항상 점검하면서, 삶을 테스트 합니다. 물론 ‘걸음(step)’은 ‘길(way)’의 동의어로서 생활방식을 의미합니다. 잠언은 청년들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타인의 말을 듣도록 권면하는 동시에,  자신의 판단이 부주의한 ‘어수룩한 사람’에 속하는지 혹은 주의깊게 행동하는 ‘슬기로운 사람’ 에게 속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 왜냐하면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어수룩한 사람은 자신의 생활방식에 주의를 기울지 않지만, 인간의 의견을 신뢰하지 않는 슬기로운 사람은 혹시나 자신이 가는 그 길이 거짓된 걸음은 아닐까 하면서 경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주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메시지를 신뢰합니다(요나3:4;출4:1-3). 슬기로운 사람은 늘 이렇게 밝은 빛 가운데로 걷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3:21, 새번역).


2021/08/06
잠언14:16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잠언은 젊은 청년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고집불통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설득 합니다. 그 방법은 전자를 ‘지혜로운 자’, 후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다”의 히브리어 동사는 ‘야르’로서 ‘경외, 염려, 사망에 대한 두려움’ 등 많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두려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햐면 잠언 도처에서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주님을 두려워(경외) 한다’ 혹은 ‘계명을 두려워 한다’는 뜻을 전달하는데 사용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잠1:7). 그러므로 여기 지혜 있는 사람은 당연히 악을 피하려고 애를 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방자하여 악을 행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믿고 조심할 줄을 모릅니다. ‘방자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바르’이며, 그 뜻은 ‘분노하다’입니다. 즉 바보가 주님이나 그분을 두려워 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여 말을 듣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보의 눈에는 악을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 뿐만 아니라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틀렸습니다. 이는 하늘의 CCTV를 못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 잠언이 드러내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신만만해 하지 않고 늘 조심하지만, 자만심에 찬 바보는 악에서 돌이키는 것을 싫어 한다(잠13:19)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늘 주님을 경외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감으로써 네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표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빌2:12,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