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2
시편 38편
“주님, 주님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님의 진노로 나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1절 새번역)
이 시는 다윗의 세 번째 참회시로서 죄 때문에 발생한 영육 간의 고통에서 구원을 부르짖는 시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2절 내리막길/ 13-22절 오르막길. 시에서 언급된 고통은 다양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죄짐, 고약한 질병으로 인한 부서질 것 같은 육체적인 아픔, 친구들로부터의 소외, 그를 파멸시키려는 원수의 움직임 등이 더해짐으로 그의 고뇌는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처음과 마지막 두 절은 본 시의 주제와 놀라움을 요약하여 알려줍니다. 그것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과 구원해 주실 분이 같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의 범죄 때문에, 주님은 분노하였고 진노하셨으며(1), 그분이 심판의 화살이 날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2). 그러나 그가 가까이 가서 도움과 구원을 호소할 대상 역시 같은 주님이셨습니다(22). 왜냐하면 오직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그런 주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가 가져올 결과들을 여실히 드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할 시가 지어진다면, 바로 이 시가 그렇습니다. 죄는 주님을 분노하게 만들고, 죄인에게 부담을 주어 무겁게 하며, 행복을 상처 투성이로 바꾸어 버립니다. 또한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마음의 평정을 빼앗아 갑니다(1-8). 더 나아가 죄 때문에 친구들은 우리를 떠나가며, 우리는 고독하고 슬퍼질 뿐만 아니라 원수는 기회를 잡아 준동하기 시작합니다(9-12). 죄를 지은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13,14). 그러나 죄는 기도의 문을 닫지도 못하고, 우리가 회개의 자리로 가는 것을 막지도 못합니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38:22)
2021/8/3
시편38:1-12절 내리막길
“내 죄의 벌이 나를 짓누르니, 이 무거운 짐을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4절, 새번역)
다윗은 죄의 짐을 지고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주님은 죄 때문에 그의 대적이 되셨습니다 (1-3).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2)라는 표현대로 질병, 고통, 버림받음, 적대와 주님의 질책이 모두 다윗에게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결과 다윗의 육신은 심한 고통 가운데 놓여져 있고, 몸도 마음도 힘이 없고(5-10) 친구도 없습니다(11). 원수들은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12). 특히 5-8절은 고통스러운 육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이 죄에 대한 벌로서 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몇몇 경우는 그렇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C.S, 루이스) 입니다. 따라서 질병의 시간은 곧 성찰의 시간입니다. 본 시편의 경우, 죄와 질병이 서로 관련되어 있고, 그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증상들이 번갈아 . 그런데 주님의 징계로 인한 질병 때문에, 다윗이 곤경에 처하자, 친구들은 그를 버리고, 원수들의 위협이 다가왔습니다. 11절은 이에 대한 생생한 필치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내 상처를 바라보곤 비켜섭니다. 가족들마저 나를 멀리합니다”(새번역). 환난을 당한 사람에게는 긴 말 하지 않아도 따뜻한 손으로 꽉 붙들어 주는 동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잔칫집에는 가지 않아도 초상집에는 꼭 가 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31절 이하의 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였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들은 영벌에 처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2021/8/4
시편 38:13-22절- 오르막길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2절)
앞 부분(1-12)은 개인적인 육체적 고통과 죄의 짐에 눌린 심적 고통에서 친구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원수들에 의한 생명까지 위협을 느끼는 상황을 말하였습니다. 본 단락에서 다윗은 절망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며, 마음을 다지고 새롭게 도약할 준비를 합니다(13-14). 이를 위해 적들의 외침에 귀를 닫고 마음을 오로지 구원하실 주님을 향해 돌립니다(15-16). 물론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태도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신뢰성 있는 자세(15), 자신이 범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겸허한 마음(18), 그리고 신속한 구원을 부르짖는 외침(22)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의 모든 고난 및 죄에 대한 용서를 주님께 부르짖으면서 점점 더 올라가고 있습니다. 명시적인 기도는 16절에 드디어 나타납니다: “내가 재난에 빠져 있을 때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새번역). 그리고 다윗은 절박하여 주님을 붙잡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왜냐하면 질병과 죄짐에 눌려 곧 멸망당할 것과 같이 연약한 자신을 원수들이 비웃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다윗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도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17-20). 그의 기도를 듣고 구원하실 그 주님은 430년 전 애굽인들의 압제하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바로 그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도성인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죄는 물론 질병이나 원수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은 없습니다. 복음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2).
2021/8/5
잠언 14:12절
“사람의 눈에는 바른길 같이 보이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있다.”(새번역).
본 구절은 “보이는 대로 살지말라”는 교훈을 말하는 단락(8-15절)의 중심 부분에 놓여져 있고, 그 이유를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앞 부분의 ‘바른-야살’은 ‘길’과 결합하여 올바른 행위로 판단되어 성공으로 가는 윤리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잠언에서 윤리적인 행동은 올바를 뿐만 아니라 성공으로 이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올바르다고 생각한 그의 길은 많은 행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가 판단하고 취한 그 행동들은 사실상 왜곡되었으며 죄된 것들이었습니다(2:13). 왜냐하면 그 마지막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 여정의 대단원이 죽음이라면, 자신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길이 실패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안전한지 그리고 그 마지막의 운명이 어떤지는 항상 보여지는 것과 같지는 않습니다(마7:13,14). 우리는 ‘기만적인 길’은 명백히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표시된 길만큼이나 확실히 사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이 발생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인간의 제한적이고 불투명한 인식과 주님이 창조하신 현실 그 자체 사이에 갈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집이 멸망당하는 이유는 인간 인식론, 즉 인간의 시각에 접근할 수 있는 상대적 진리라는 허술한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된 그 길을 알고 계십니다. 진리는 유한한 인간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그 바른 길을 계시하셔야만 하고, 신자는 믿음으로 그 계시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3:7). 이 잠언은 또 한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16:25).
2021/8/6
잠언14:13
“웃어도 마음이 아플 때가 있고, 즐거워도 끝에 가서 슬플 때가 있다.”(새번역)
13절에서 잠언 기자는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즐거워 보이는 모습은 마음의 아픔을 위장하는 행태일 수 있으며, 결국에는 감추고 있던 슬픔이 분명하게 나타날 것임을 말하여 12절과 같이 피상적인 판단을 유보하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생은 불편함을 참을 수 없어 부르짖는 아이의 울음으로 시작되어, 죽음이라는 슬픔으로 마치게 됩니다. 그 사이에 웃음은 마음의 고통으로 엷어지고(14:13a), 결국 슬픔이 기쁨을 뒤따라옵니다(13b절). 인간은 죽기 때문에 기쁨은 반드시 슬픔으로 귀결됩니다. 파티는 늘 끝나고, 사랑의 행동들은 그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은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27:1, 새번역)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색조는 잠언의 주된 주제 즉, “의인을 위해 기다리는 것은 ‘기쁨, 생명 그리고 소망’이지만, 악인은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만 합니다(10:28)/ 24:19. 20). 인간의 존재를 이렇게 묘사하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 계속될 하나님과의 관계에 구원과 참된 가정(true home)이 있음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3:1-12).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실로 현재 경험하는 기쁨은 덧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성숙해져가면서, 지금 권면하는 잠언의 지혜가 완전히 빛을 내게되는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는 신자들의 소망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롬6:23,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