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9
시편36편 – “한 분 하나님 그리고 두 가지 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10절, 새번역)
이 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볼 수 있습니다.
A (1절) 악인과 그의 철학
B(2-4절) 악인의 특성
C(5-8절) 주님의 성품
B’(9-11절)주님을 아는 자들
A’(12절) 악인의 운명
이 시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이 두 종류의 사람과 두 종류의 운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쪽은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다른 쪽은 주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갈래길에서 각자의 선택을 함으로 자신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갈래길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계시한 뜻을 거부하면 우리는 마음의 욕망을 따라 살게 되고, 결국 무가치한 인생으로 귀착됩니다. 이 반면, 계시를 포용하여 그분의 뜻을 행한다면 주님이 주시는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 광명, 공급하심 그리고 보호하심을 누릴 것입니다. 1940년 7월 어느 아침 그리스도인이자 리투아니아 총영사인 스기하라 치우네(40살)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이미 게슈타포에게서 탈출한 유대인들에게 비자발급을 중단할 것을 명령받았지만, 고민 끝에 불복종합니다. 그리고 28일 동안 쉬지않고 비자를 발급하여 6천명의 생명을 구하고, 토교로 소환된 직후 사직 당합니다. 그는 일생 전구를 팔면서 가난하게 살아갔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2021/07/20
시편 37편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11절)
이 시는 다윗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시로서, 신자의 삶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말하며, 어조나 문체는 잠언에 유사하고, 핵심 메시지는 의인은 주님의 보호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고뇌에 찬 긴장과 함께 시작하는데, 그 긴장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의인’과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분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는 ‘악인’의 운명을 대조하며 신앙의 삶에서 겪게 되는 갈등입니다. 한편, 이 시의 구조는 거의 완전하게 히브리어 알파벹 순서를 따라 작성되었고, 네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11절 악인의 번영 – 온유해라
12-20절 악인의 적대감 – 주님의 돌보심을 믿어라
21-31절 악인의 거짓된 행동 – 주님의 심판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라
32-40절 악인의 운명 – 주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한다.
이 시에 맞는 악인과 의인은 단연 왕 사울과 신하 다윗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종의 갈래길에서 불순종의 길을 선택하기 시작하고(사무엘상 15장의 아말렉과의 전투 사건), 골리앗을 죽인 능력있는 신하 다윗을 까닭없이 질투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이 반면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받는 절박한 순간에도 순종의 갈래길에서 의를 행합니다. 결국 사울과 그 가문은 멸망 당하고, 주님은 의로운 다윗을 끝까지 보호하사 왕으로 삼습니다. 온유하게 주님의 뜻을 따른 다윗이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팔복 중 3번 째 말씀(마5:5)을 체험하고, 본 시로 아주 훌륭하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5:5, 새번역).
2021/07/21
잠언14:8-15절 : 구조와 메시지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는 자기가 가는 길을 깨닫게 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인다.”(8절, 새번역)
잠언14장 8-15절은 ‘속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묶여 있습니다. 핵심된 교훈은 “보이는대로 살지말라”는 경고입니다. 솔로몬은 이 경고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11절을 중심에 두고 교차대구의 구조를 사용합니다. 즉, 8절과 15절은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 9절과 14절은 “죄에 대한 보상”, 10절과 13절은 “마음의 비밀”, 그리고 중심에 놓인 11절,12절은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번영”을 말하며 “죽음에 이르는 속이는 길”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쌍을 이루는 두 구절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8절은 ‘미련한 사람이 자기를 속인다’라고 하나,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지만, 15절이 ‘미련한 자는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하여, 그들의 순진성을 지적함으로 보충하고 있습니다. 10절과 13절은 어떤 사람도 타인의 마음의 상태를 알지 못하므로 행복의 외양은 기만적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9절은 악인은 속건제가 요구하는 보상을 피해갈 수 있다고 믿지만, 14절에서는 주님의 응보가 확실함을 선언합니다.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즉각적으로 벌이 내리지 않기에 악인은 속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회초리는 확실하기에, 악인은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중심을 이루는 11절, 12절은 악인의 눈에 확 뜨이는 성공은 짧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번영은 항구적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 사망의 길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이 주는 교훈’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잠언14: 15절, 새번역)
2021/07/22
잠언14: 9절 :
“어리석은 사람은 속죄제사를 우습게 여기지만,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다.”(9절, 새번역)
이 구절은 ‘어리석음/바보”라는 주제어를 통해 8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보들은 속고 속이면서 이득을 취하기에(8절), 관계회복을 의미하는 속죄제사를 경멸합니다(9절). “속죄제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샴’으로 ‘속건제사’를 의미합니다. “속죄제사”와 달리 “속건제사”는 거짓맹세, 도둑질, 그리고 속여 재산상 이득을 보는 경우를 포함하며, 이 경우 원물에 20%를 더하여 배상하고, 제물을 드려야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속함 받습니다. 본 잠언은 손해를 가하고도 배상하기를 거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배상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립니다. 물론 이 표현은 사람들 사이에 서로 받아들이고 호의를 베푼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실로 정직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나 이웃들 사이에서 샬롬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은 죄의식을 불러 일으킬 상황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만약 잘못을 범하였다면, 그에 합당한 배상을 행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잘못을 행하고도 배상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우습게 여김으로, 하나님과 이웃들 사이에서 화평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사랑 가운데 화합을 이루려고 하기에 그 태도는 어리석은 자와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실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명을 속건제물로 드려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 회복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이 지향할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2021/07/23
잠언14: 10절
“마음의 고통은 자기만 알고, 마음의 기쁨도 남이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새번역) 마음의 ‘고통과 기쁨’이란 인간의 감정 전체를 표현하는 방식이며, 타인은 모르고 오직 당해 사건의 당사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외적 환경이 있지만, 만약 그런 외양만 감안한다면, 판단을 그르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서적, 지성적, 종교적 그리고 도적적 움직임은 너무나 복합적이고도 내적인 동시에, 매우 개인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경험할 수도, 타인에게 적절하게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히 인간의 마음을 아십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는 자식이 없는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풍족하였고, 두 명의 부인을 둔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잉태하지 못하는 자신이 매우 괴로웠으며, 또 한 명의 부인은 이런 한나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남편은 한나의 마음의 고통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주님께 기도하였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잠언은 각 개인이 가지는 존엄성과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타인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타인의 심정도 헤아릴 것입니다. 이 반면 만약 우리가 타인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다면, 한나와 같이 하늘에 계신 자비하신 대제사장인 우리 주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히4:15-16). 이와 동시에 우리는 타인 특히 배우자를 배려할 수 있도록 사랑의 지도를 만들어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의 구체적 방법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