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6/14 – 18)

2021/6/14
시편 28편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이시다. 내 마음이 주님을 굳게 의지하였기에, 주님께서 나를 건져 주셨다. 내 마음 다하여 주님을 기뻐하며 나의 노래로 주님께 감사하련다”(7절, 새번역)

다윗은 원수들의 악의로 생명의 위협을 당한 상황에서 간절히 구원을 호소합니다. 만약 주의 도움이 없다면, 그는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1절),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부당한 치욕으로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3-4절). 의로운 자신은 죄인 처럼 억울하게 죽고, 입으로만 평화를 외치는 악인들은 벌을 피해 간다면 정말 불공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셨고 다윗은 찬양과 동시에, 이런 구원이 주의 백성 전체에 미치도록 기도합니다(6-9절). 얼마전 정봉주 전 의원이 출연한 한 시사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2007년 대선 때 BBQ 사건을 말하다가 기소되어  2011년 대법원에서 1년의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옥살이 중 250일은 억울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그러면서 계속 자신의 삶을 반추하자 초등학교 3학년 때 저지른 잘못이 떠올랐고, 그후부터 눈물을 그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당한 심문, 고문은 물론 더 나아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는 십자가의 죽음까지 사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이 거룩한 대속의 죽음을 받으사 죄인들이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노래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시고 구원이심을 믿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편46:1).


2021/6/15
시편 29편 – 폭풍을 지배하는 왕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신다.”(11절, 새번역)

이 시는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다윗의 시입니다. 찬양의 시작은 천상의 존재들이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곳인 하늘에서부터 입니다(1-2절). 이어 그 찬양은 바다에서, 북쪽 레바논에서, 남쪽 가데스 광야에서 일어나는 폭풍과 천둥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3-9절). 마지막 부분에서 다윗은 그 영광의 주님은 지상에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축복하시는 분이심을 발견하며 찬양합니다(10-11절). 이 시에서 우리는 다윗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자신 보다 훨씬 강한 천상의 존재들도 주님께 순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예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령하여 주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천사 한 명이 순식간에 이스라엘 7만명을 죽이고 이어 예루살렘을 멸하려고 칼을 들고 천지 사이에 선 것을 보고 다윗이 엎드려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는 선견자 갓을 통하여 다윗 왕으로 하여금 아라우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쌓도록 명령 하였습니다 (삼하24장/ 역상21장). 한편, 다윗은 바다와 레바논 그리고 광야를 휩쓰는 폭풍 및 천둥 소리 가운데서도 그런 피조물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힘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능력의 주님은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면 힘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처럼 우리는 순종을 배워야만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말고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이들아,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라.”(잠3:11).


2021/6/16
잠언 13:19절
“소원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즐겁지만, 미련한 사람은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새번역)

12절에 시작된 단락을 마무리 하는 ‘19절의 주된 가르침은 의인들로 하여금 선한 것을 열망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자신의 욕망이 성취됨으로 즐거움을 경험하지만, 바보들은 악함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19절 전단은 심리적인 사실을, 19절 후단은 도덕적 사실을 묘사하여, 진정한 심리적인 기쁨을 누리려면 반드시 도덕적 요소를 구비할 것을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성취되었을 때 영혼에 달콤함을 가져다 주는 욕망은 악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보는 자신의 불경건함과 비도덕적인 삶에서 돌이키기를 혐오하기 때문에 이런 즐거운 만족감을 결코 경험하지 못합니다. 실로 어리석은 자들은 악에서 떠나기를 싦어합니다. 그 결과 바보들은 생명보다 사망을(14절), 은혜보다는 멸망을(15절), 보호보다는 드러내는 것을(16절), 치료보다는 재앙을(17절), 사회적 존경보다는 미덕 없는 수치스러운 가난을(18절)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예가 선지자 발람입니다. 그는 의인과 같이 죽기를 바랐지만, 모압 왕 발락이 주는 재물과 부귀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커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모세에 의해 죽고 맙니다(민23:10, 31:8). 이들은 지혜자의 영감된 가르침을 멸시하기 때문에 생명의 주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만이 참된 만족과 샬롬을 가지게 됩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교정한다면, 인간에 대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행동 역시 변화될 것입니다(3:7; 16:6). “지혜란 야훼께서 주시는 것,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로 지식과 슬기를 깨치게 된다.”(잠언2:6, 공동번역)


2021/6/17
잠언 13:20절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새번역)

20-25절까지 6 구절은 13장 마지막 단락으로 ‘지혜로운 아들이 가지는 축복된 미래와 바보들이 당할 해로운 결말’을 대조하면서 선과 악에 관한 주제를 다룹니다. 그 출발인 20절은 자녀들이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다닐 것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다니다 Walk’는 ‘행위나 생활방식’을 의미합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라는 권고는 현명한 자의 가르침, 격려 그리고 본보기를 가지고 살아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95%가 도덕의 문제이며, 똑 같은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상황을 고려하여 해결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때 만약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 – 교만하거나 탐욕적인 사람, 정욕적인 남녀, 우상숭배자, 쉽게 분노하거나 왜곡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등 -과 사귀고 있다면, 자신 역시 그들의 영향에 노출되어,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정의의 집행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큰 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완전한 모델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신앙 생활이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당연히 지혜를 얻게 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생명과 축복과 화평의 열매로 가득찹니다. 좋은 예로 에녹(창5:22)이나 노아(창6:9)는 각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전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였고, 후자는 방주 예비함을 지시받아 홍수로부터 전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2021/6/18
잠언13:21절
“죄인에게는 재앙이 따르지만, 의인에게는 좋은 보상이 따른다.”(새번역)


이 잠언은 행위와 운명의 관계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본 잠언은 의인화의 기법을 사용합니다. 즉 ‘재앙’과 ‘좋은 보상’이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타인에게 주는 그 재앙이 돌아와서 그들을 멸망시키며, 의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그 선은 정당하게 그들에게 보상을 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재앙’은 마치 사냥꾼과 같이 인격화 되어 있습니다. 그 뉘앙스는 피의 복수자가 살인자를 추격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가한 그 해악들이 죄인들을 맹렬히 추격하고 결국 사냥하여 멸망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물론 세상의 역사를 보더라도, 악인들이 자신의 부패하고 부풀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저지른 악한 행위의 결과가 돌아와 그들을 물어 죽인 실례들로 차고 넘칩니다. 비히 850년 경 악한 왕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참혹한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군대장관 예후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시고 아합의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때 왕비 이세벨은 자기 시녀들에 의하여 이층에서 던져저 죽었고, 이어 개들이 먹어버림으로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성경과 세상 역사의 차이는 정의의 집행자가 누군인지를 성경은 밝히 드러내고 세상은 모를 뿐입니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 반면 의인이 타인에게 베푼 생명을 주는 혜택들은 돌이켜 같은 은택으로 보상합니다. 이 역시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늘 경외하여야 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