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7
시편 26편 – 선한 양심의 호소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새번역)
다윗의 이 시는 완전함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1절)과 끝(11-12절)을 맺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의 감찰(2절)과 행동(9,10)을 요청하고 자신의 무죄함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가 나오게 배경은 다윗에게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환경입니다. 믿음 생활에서 선한 양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선한 양심이야말로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이는 우리가 선해야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순결하게 살 때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게도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특징적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문자를 가지고 죽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드리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만유의 주가 되신 바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의 생명을 앗아 가려고 혈안이 되어 음모를 꾸미고,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10절) ‘죄인’에 맞서서 자신의 양심을 걸고 하나님 앞에 결백함을 단언합니다. 이 시에 나타난 단어들을 보면, 적들은 다윗의 생활양식(3절), 사귀는 동료(4,5절), 종교의 현실(6-8절)을 향하여 포문을 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개인적으로나(3절), 사회적으로나(4,5절), 영적으로(6-8절) 깨끗하였습니다. 다윗이 주님 앞에 드렸던 이 기도와 고백을 우리 역시 끊임없이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고후5: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2021/6/8
시편 27편 – 기도로 일하는 믿음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3절)
시편 26-28편을 읽으면, 먼저 성전(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26편은 예배자가 성전에 가까이 갈 때 신실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묵상면서 양심을 살피다가 마지막 구절(12절)에서 허락을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27편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성전을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성소요, 비젼의 장소로 여깁니다. 28편에서는 성소에 들어간 시편기자가 공평한 정의를 위해 지성소를 향해 탄원하고 응답을 받습니다. 27편은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3절) 주님 안에 있는 확신 – 지지하심
( 4-6절) 안전을 위한 첫번째 기도
(7-12절) 안전을 위한 두 번째 기도
(13-14절) 주님 안에 있는 확신 – 응답하심
어떤 분은 중학생 때 어둑해 지는 저녁 시간 동네 길을 걷다가 불량배 셋을 만나 주머니 돈을 전부 털렸다고 합니다. 셋만 둘러싸도 겁이 나는데 시편기자는 군대가 둘러싸도 무섭지 않다고 외칩니다. 뭘 믿고 큰 소리 치는 것일까요?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과 늘 긴밀한 교제를 나누며 동행한 다윗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들이 엿보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조차 다윗은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믿음과 기도가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시며, 이런 주님의 구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교제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편63:3).
2021/6/9
잠언 13:16
“슬기로운 사람은 바로 알고 행동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음만 드러낸다.”(공동번역)
생명과 존경 말고도 우리 마음은 안전을 갈구합니다. 이 잠언은 ‘모든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을 대조 합니다. 여기서 ‘모든’이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라 함은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로서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보호조치를 강구하며 조심스럽고도 사려깊게 말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오랫 동안 적자가 나는 카메라 산업을 유지하였으나 2017년 카메라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침례를 받으신 후 처음 맞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많은 표적들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믿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2:24-25). 한편, 도덕적 행동과 도덕적 결과를 연결시키기를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하되 신경질적으로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도덕적으로 거만한 말과 행동에 대한 환유법입니다. 또한 ‘드러낸다’는 의미는 행상인이 자신의 물건들을 사람들 앞에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당장에 드러낼 정도로 거만한 사람입니다(잠12:16).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세상에 주인이 계심을 알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쓸 데 없는 말 한마디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9:10, 새번역).
2021/6/10
잠언13:17
“못된 전령은 사람을 재앙에 빠지게 하지만, 충직한 사신은 재앙을 물리치는 일을 한다..”(새번역)
본 잠언은 악한 전령(사신)의 성품과 그가 초래하는 불행한 결과를 양심적인 전령(사신)과 그가 공동체에 가져오는 치료효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15절(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을 함께 고려한다면, ‘못된 전령 bad messenger’은 ‘사악한 자’와 상응하여 반역적이고 신뢰성이 없어 자신을 고용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전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전령들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아 쓰고, 말하는 분야를 포함하여 여러 방면에서 높은 수준의 역량을 갖춘 사람들로서, 외교사절, 군인, 왕실의 대변인, 총독, 정보요원, 물건운송, 후견인, 그리고 왕실의 첩자와 같은 많은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령이라는 전문적인 수행원은 용기와 담대함을 갖춘 자여야만 하고 군사전략과 전술에 관한 공부까지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이런 훈련과 또 그들의 수행하는 임무의 중대성에 비추어, 국가는 그들에게 예외적으로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특권적인 대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진 문헌에 나타난 매우 희귀한 관료들의 이름 가운데 이들의 이름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임진왜란 직전 1590년 3월에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부사 김성일(동인)은 도요토미의 침략야욕을 감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사 황윤길(서인)과 정반대로 왜군의 침입은 절대로 없을 것으로 보고 하여 조선을 재앙에 빠뜨린 사람입니다. 그렇게 거짓 보고를 한 이유는 당파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돌이켜 진주성을 수비하다가 병사하였지만 역사는 그의 죄책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
2021/6/11
잠언 13:18
“타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난과 수치가 따르고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현대인의성경).
본 잠언은 13절과 매치를 이루면서, 13절에서 18절에 이르는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양 구절은 보상과 벌은 행위의 교정여부에 의존함을 알려줍니다. 특히 본 잠언은 책망을 듣고도 행위를 교정하지 않는 자는 부끄러운 가난에 이르지만, 행위를 교정하는 자는 박수를 받고, 존경과 재물을 넘치도록 받는다고 말하면서(3:16; 8:18) 두 종류의 사람 사이에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책망을 듣지 않는 사람은 ‘가난과 수치’ 즉, ‘수치스러운 가난’을 갖게 됩니다. 대조적으로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여기서 존경은 사회적 명예 뿐만 아니라, 부를 수반함으로 사회에서 중요하게 대우를 받는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22:4). 한편, 빈곤을 가져오는 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 게으름(10:4), 쾌락과 사치를 사랑함(21:17; 28:19), 일하는 대신 수다를 떠는 경향(14:23), 통상의 악함(13:25), 그리고 줄 것을 안 주는 비열함(11:24). 그러나 본 잠언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 즉, 그것은 말과 노새와 같이(시32:9), 잘못된 요소들을 교정하라고 타이를 때 듣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실패로 인한 가난은 불명예를 가져옵니다만, 불의를 거절함으로 찾아오는 가난 – 미덕을 가진 가난(17:1; 19:1) – 은 불명예롭지는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훈계를 백안시 하는 자들은 가난과 수치로 징계를 받지만, 타인으로부터 오는 그런 징계에 순종하는 자들은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됩니다. “지혜와 깨달음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그것이 은이나 금보다 더 가치 있고 유익하기 때문이다.”(잠언3:13,14,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