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6
시편17편
“주님, 이 세상에서 받을 몫을 다 받고 사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몸소 구해 주십시오. 그들은 주님께서 쌓아 두신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남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그래도 남아서 자식의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줍니다”(14절, 새번역)
이 다윗의 시는 ‘들으소서’(1절), ‘기울이소서’(6절), ‘일어나소서’(13절)의 세개의 호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호소(1-5절)는 다윗의 의로움을 변론하며, 두 번째 호소(6-12절)는 무자비한 원수로부터 절박한 구원의 필요를 알리며, 세 번째 호소(13-14절)는 하나님의 행동을 요청합니다. 결론(15절)으로 주님의 얼굴을 뵈올 것을 믿으며 의롭게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사무엘상 23:25절 이하가 이 시의 배경으로 생각됩니다.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은 군사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면 산 저쪽으로 피신할 정도로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포위되어 잡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기치 않은 블레셋 군대의 침입으로 사울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사해 북쪽 오아시스 엔게디로 피신합니다. 이렇게 다윗이 계속 피신한 이유는 사울이 왕으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의 이 기도는 응답을 받지만, 자신의 말처럼 의롭게 주님을 뵐 수 있는지 여부는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 시험은 엔게디 동굴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은 다시 자신을 죽이러 왔다가 일을 보러 동굴에 들어온 사울 왕을 살려줍니다. 다윗은 주님의 시험에서 합격하였습니다.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시편17:15, 새번역)
2021/04/27
잠언12:28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본 절은15절부터 시작되는 12장 후반부를 결론 내리는 장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생명과 사망은 영원한 심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영원한 교류를 가지게 됩니다. 의학적인 죽음, 즉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 내지 못합니다. 잠언14:32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난이 오면 악인은 쓰러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어도 희망이 있다.”(현대인의성경). 잠언 14:32절과 본 구절을 비교한다면, 잠언의 ‘지혜’는 금생의 삶을 돌파하여 죽음을 넘는 삶을 말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공의로운 길에 In the path of righteousness”라는 말은 인간 실존이 걸어가야만 하는 윤리적인 영역 즉,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친절하게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그의 생활방식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의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만, 그로 인한 결과들까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들을 산출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도덕질서를 유지하여서 우리들이 행하는 ‘의’가 풍성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영역에 머무르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한 마디로 의의 댓가(wages)는 주님 앞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를 행한다 하여도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경건한 의’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나오는 어떠한 ‘의’ 보다 탁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길에 있는 자들을 받아들이셔서 당신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다. 다만 지금은 그 맛만을 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충만함을 경험할 것입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잠언10:16).
2021/04/28
잠언13:1
“지혜로운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지만, 거만한 사람은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새번역)
잠언13장은 4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6절) 언어와 윤리, (7-11절) 재물과 윤리, (12-19절) 지혜와 어리석음이 낳는 삶의 결과, (20-25절)영원한 삶의 조망. 13장 1절은 이 모든 것을 이끄는 도입부분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혜로 만든 곳이기 때문에, 자녀들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하여 아버지는 지대한 관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지혜로운 아들과 거만한(mocker) 사람을 대조하여 그 특징을 묘사함으로 순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자는 아버지가 타이르는 말을 주의 깊게 듣지만, 후자는 도덕적 꾸지람과 교육 과정을 경멸합니다. ‘꾸지람 rebuke’의 히브리어는 “도덕적으로 분개하여 항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언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하고 가르치는 대행자들을 ‘지혜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부모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절은 거만한 자들은 범죄하지만 도덕적 훈계를 받기 거절한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실상 지혜로운 사람이 받은 한 마디의 도덕적 책망은 미련한 자가 받는 매 100대 보다 더욱 효과적입니다(잠17:10). 주님께서 거만하며 남을 조롱하는 자들을 통조림(?)으로 만드시는 것을 본다면 순진하여 속기 쉬운 자들 역시 정신차릴 것입니다(잠19:25). 우리 주님을 그리고 있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은 지혜로운 아들의 모델이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반역한 죄인들이 사는 고통스러운 징계의 학교인 세상에 내려오셔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2021/04/29
잠언13:2
“선한 사람은 자기가 한 말로 복을 누리고 살지만 악한 사람은 폭력을 일삼는다.”(현대인성경)
From the fruit of his mouth a man eats what is good, but the desire of the treacherous is for violence. (ESV)
2절은 ‘먹는다 eat’는 단어를 사용하여. 1절의 ‘듣는다’에서 3절의 ‘말하다’라는 문장으로 부드럽게 이전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과 공동체에 충성스럽게 말하는 자는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산출하나, 불충한 자들은 이와 반대입니다. “사람이 좋은 것들을 먹는다”는 문장은 믿음성 있게 말하는 자가 공동체에 바람직하고 도움이 되는 혜택을 만들어낸다는 것으로 일종의 환유법(미국 대통령 대신 ‘백악관’을 사용함)입니다. 그리고 진실되고 신뢰있는 말을 듣는 자들은 영적으로 바르게 양육됩니다. 따라서 2절은 1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1절에 등장하는 부모의 가르침을 듣고 자라나는 아들딸들은 하나님과 공동체에 정말 마음에 드는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자녀가 가르침에 순종한다면, 그들은 좋은 것(복록)을 넉넉하게 얻을 것입니다. 이 반면, 반역자는 거짓되거나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녀들과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고 약탈합니다. 이 같은 자들(거만한 자가 포함)은 엄히 꾸지람을 들어야만 합니다(1절). 그러나 이들이 행한 강포는 부메랑이 되어 그들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인데, 결국 그들에게 “멸망이 찾아옵니다”(3절). 이렇게 불충한 자는 친절이나 좋은 교훈과 관련하여 어떤 욕망도 없고, 충성스러운 자는 강포를 행할 아무런 욕망이 없다는 진실을 통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행위는 그 어떤 것이든 따르지 말아라.” (잠3:31,새번역).
2021/04/30
잠언13:3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 (새번역)
3절의 표제어는 ‘입mouth’입니다. 2절에서 ‘입’은 좋은 말을 내어 열매를 맺으라고 격려하지만, 여기서는 나쁜 말을 억제하도록 권고합니다. 또, ‘생명’의 히브리어는 ‘네페쉬’로 그 어근은 ‘목 neck’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의미는 ‘욕망’에서 ‘생명’으로 흘러갑니다. 만약 입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좋은 것들을 먹습니다(2절). 만약 입을 적절하게 통제한다면 사람의 생명을 보전합니다(3절). 이제 언어가 먹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생사의 문제로 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폭언은 결국 ‘공포와 파멸’을 낳기 때문입니다(3절). 물론 부적절한 언어의 사용에는 성급하고 수다스러운 자기 중심적인 말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 문맥에서 경고하는 것은 폭력적인 언어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입을…여는”이라는 단어입니다. “열다 open”의 원어는 “파사크’인데 에스겔서에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열방의 신들에게 분향하는 모습을 거리에서 음행하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정욕 때문에 음행을 하여 파멸하듯이, 말하고 싶은 욕망이 격랑과 같이 몰려와 절제하지 못하고 입을 함부로 열게 되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들은 거의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분수를 모르고 폭언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백성이 와서 부역 경감을 청원하자, 불순종하는 자는 “전갈로 징치하겠다”는 포학한 말을 하여 나라의 2/3를 상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약3:5,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