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3/22-26)

2021/03/22
시편13편 – 쓸쓸함이 환희로 변화함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5절, 새번역)

다윗의 이 시는 3파트로 나누어집니다. 마음이 비탄에 젖었으나(1,2절), 이 비탄은 절박한 도움의 기도로 융합되어(3,4절), 마지막으로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믿고 평온한 안식에 이르게 됩니다(5,6절). 시인이 비탄에 젖은 까닭은 절박한 상황이나 하나님은 신속히 응답하지 않고(영적인 차원), 자기 영혼은 근심 속에 빠져 있는데(개인적 차원), 원수는 의기양양하게 나다니는 상황(상황적 차원)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 세 부분을 모두 언급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의 결과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믿게 되고, 시인의 슬픔은 기쁨이 됩니다. 그것은 근심스러운 상황을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인의 비탄은 기도를 통하여 환희로 변화되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길 때 기도의 위력을 체험하였습니다(삼하15-17장).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자 그의 모략이 어리석게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새에게 거짓으로 압살롬에게 항복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라고 밀령을 내렸습니다. 다윗은 울며 맨발로 도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히도벨은 기습작전을, 후새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제안하였고 후새의 전략이 채택되었습니다. 이것이 압살롬의 멸망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묘책을 좌절시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신뢰하면서 지혜롭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16:33).


2021/03/23
주일학교에서 목사님이 십자가형과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한 어린이가 말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실일 리가 없어요”
“왜”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목사님이 그 이야기를 할 때,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났을 거예요”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번 주 일요일은 종려주일로서 주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백성들이 연도에 나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요한복음은 백성들이 얼마 전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환호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 본인은 성에 다가오시자 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환호하는 유대와 예루살렘 백성들의 멸망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주님의 말씀대로 40년 이내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나귀 타고 입성하신 지 5일 후 유대지도층의 고발로 십자가 형에 처해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본 사실이고, 실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자원하여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이런 영적인 사실은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 아니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여 왕으로 임명되셨다는 사실은 우리 가운데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 보다 더 강력한 증언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왕의 등극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소식과 선포이지 논리가 아닙니다. 보도를 들은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롬5:8).


2021/03/24
어떤 소년의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즈음에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교회에 가서 요람에 누인 아기 예수의 상을 꺼내 집으로 가져오면서 그 상에게 말하였습니다.
“자, 이제 엄마가 없는 게 어떤 건지 알겠지?”
그러나 소년의 어머니는 회복되었고, 소년은 아기 예수의 상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마음은 달리 생각할 수 있지만, 분명히 소년의 행동과 소년의 어머니의 회복은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정신 심리학의 목표는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어린 아이적 요소 – 상처 입은 자아 등 -로 인한 정신 질환을 치료하여 정상적인 어른의 수준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의사와 함께 굿굿하게 이겨나가면 마음은 치료받게 됩니다. 물론 여러 약물이 투여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치료와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장사된 후 사흘만에 부활하사 어두움의 세력들을 포함한 만유를 통치하시는 우주의 진정한 주인으로 임명되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사화복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그분의 결정을 거치지 않으면 발생 불가능하며, 결국 주님의 뜻이 이루짐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는 같은 고난을 당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징크스에 휘들리거나, 어린아이처럼 움추려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근심을 주님 손에 맡기고 굿굿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니, 자연히 정신 심리학이 달성하려는 목표가 성취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과 같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시편125:1, 새번역).


2021/03/25
다섯 살 된 미하이가 말썽을 부리다 전기 충격을 받자 보모는 “넌 이제 죽을 거야!”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 말을 믿은 미하이가 그런 슬픈 사연을 말하자, 아빠는 안심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혹 네가 죽더라도 넌 천당에 갈 테니까” 그러자 미하이는
“그러겠지요. 그러나 난 여기 살면서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하였습니다.

R.풀검은 책(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에서 말합니다.
 “지혜는…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었다. 무엇이든 나누어 가져라/ 공정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말라/ 자신이 어지럽힌 것은 자신이 치우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라/ 내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말라/…. /균형 잡힌 생활을 하라. 매일 공부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라./ 매일 오후에는 낮잠을 자라./ 경이로움을 느끼자./ 금붕어와 햄스터와 흰쥐와 스티로폼컵 속의 작은 씨앗마저 모두 죽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이 속에 들어 있다. 황금률과 사랑과 기본적인 위생, 그리고 환경과 정치와 평등과 건강한 삶까지”
만약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운 상기 가르침대로 산다면, 세상은 천당(1,000당)은 아니어도 팔백당(800당)은 될 것입니다. 그밖에 병들고 죽고, 낡아지는 문제 등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나라를 도래시킬 때까지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치원생 미하이의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엡2:10).


2021/03/226
잠언12:23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12:16-23절을 전체적으로 볼 때, 바보는 자신의 위험한 감정이나 도덕적인 오만함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모욕과 지식 모두를 감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자는 올바른 상황이 형성될 때까지 자신의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 통찰을 숨겨두는 반면, 바보들은 때와 상황에 관계없이 오만한 행동과 말을 쏟아냄으로 끊임없이 소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혜자는 바른 상황을 기다릴 수 있는 자기통제력과 어느 시기에 입을 열어야 하는지를 분간할 신중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절제하는 동안 자신의 상황을 통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그를 알지 못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요청하는 자에게 자신의 지식을 숨긴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들을 귀가 없는 어리석은 자에게나, 밝힐 경우 치료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가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감추어 두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이 잠언을 배웠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모든 진리가 예외 없이 각 사람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며, 또 모든 때와 상황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도외시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의로운 욥을 책망하고 끊임없이 회개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쏟아낸 오만한 도덕적 판단으로 재앙을 당한 욥은 더욱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욥을 변호하셨고, 세 친구의 어리석음에 노하셨습니다. 욥의 경우와 같이, 우리가 슬기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