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5
시편12편 – 다윗의 시
“주님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요, 일곱 번 걸러 낸 순은이다.”(6절, 새번역)
시의 형태는 기도(1-2) – 약속(3-6) – 기도(7-8)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악인들의 거짓말로 신실한 사람들이 없어지는 등 위협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약속을 듣고 안심합니다. 왜냐하면 악인들의 말과 달리 주님의 말씀은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악인이 여전히 주위에 우글거리는 현실 역시 도외시 하지 않고 직면하는 용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해관계 때문에 중상모략하는 일은 3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본 시편은 ‘말(word)’이 갖는 위력을 보여줍니다. 첫 조상의 타락 역시 ‘말’ 때문입니다. 순진한 하와와 아담은 그 거짓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서 먹은 결과 인류는 마귀의 수중에 넘어갔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 말씀은 ‘복음’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진실하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공자는 60이 되면 “이순- 耳順” 즉 귀가 순하여져 말을 분별한다는 경지를 이야기합니다. 이분은 성경을 모르는 분이나 열심히 노력하여 그런 분별력을 가졌음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분별력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게 되면 저 세상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도 큰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이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시19:11, 새번역).
2021/03/16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거나 자신을 훌륭하다고 여기는 일’을 언급합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한 말로서,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하여 평생을 들여다 보다가 물에 익사하여 수선화(narcissus)가 됐다고 합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자 한 소년이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일학교 선생님도 나르시시스트예요. 그분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해요. 그런데 머린랜드에 구경갔을 때 보니까 고래와 물개들이 기가막힌 재주를 다 피우던데요. 몸무게가 사십 톤이나 나가는 사람이 뒤로 돌 수 있겠어요? 성경은 왜 예수님을 사자나 양이라고 불러요? 사자는 사람보다 강하고 양은 사람보다 겸손하기 때문이지요.”
확실히 어린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동물계를 멸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기에, 인간속에는 창조자의 형상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동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하여 주인되신 하나님을 머리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 대신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채워버렸습니다. 이것이 죄의 근본이요, 원죄입니다. 모두 나르시시스트(자기애에 빠진 사람)가 된 것입니다. 물론 건전한 ‘자기애(自己愛)’는 인간 창조의 구성부분이지만, 인간은 모두 균형을 못잡고 넘어졌습니다. 회개는 여기서 돌이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겸손의 의사표시입니다. 그러나 범한 죄들이 너무 많아 하나님께 돌아갈 길은 막혀 있었습니다. 그 길을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여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2021/03/17
미국 콜로라도 주의 오로라시에 살고 있는 찰리라는 8살 소년은 아주 장난이 심하였습니다. 한번은 일부러 다른 학생들의 학용품을 부수어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찰리의 어머니는 그에게 줄 용돈으로 학용품값을 대신 물어 주겠다고 하자 그는 화가 났습니다.
“내가 말썽을 부리면 용돈을 빼앗기는데, 우리 부모가 크게 싸우고 말썽을 부려도, 하나님은 그분들의 용돈을 빼앗지 않는구나!” 그리고 그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찰리의 동생은 할머니에게 “형은 하나님을 방문하기 위해 천국에 갔으니까 두어 주일 지나면 돌아올 거예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아이는 판단력과 경험이 미숙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든 부모에게는 미성숙한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양육할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를 공경해야만 한다는 방향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 적용에서는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머지는 인간의 지혜에 맡겨져 있습니다. 현대의 심리학과 의학에서는 어린아이의 발육과정, 가정환경, 그리고 정신심리적인 관계를 다룬 많은 연구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는 젖이나 우유를 먹고 자라는 데도 아무런 탈이 없는 이유는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나오지만, 4-5살이 되면 이 효소가 사라지기에 (특히 동양인들) 반드시 젖을 떼고 밥을 먹여야만 합니다. 이를 배운 사람들은 아이들의 신체변화를 이해하고 양육 시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로운 농부처럼 부지런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는 주님을 경외하는 성숙한 어른이 될 것입니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어리석은 자는 교육을 받아 지혜로워지는 것을 멸시한다.”(잠언1:7, 공동번역).
2021/03/18
레닌이 어렸을 때 교회에 결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레닌의 부친이 신부에게 이 문제를 상담하였을 때, “때려요, 힘껏 때려야 합니다.”라는 대답을 받았습니다. 불행히도 어린 레닌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레닌의 전기 작가들은 어린 레닌이 이때 맞은 한 번 매가 그로 하여금 평생토록 하나님을 증오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유고슬라비아 독재자 티토는 어렸을 때 미사 때 신부를 돕다가 포도주를 엎질렀고, 신부에게 뺨을 맞으면서 꺼지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티토는 그 사건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신론자가 되었고 혁명을 위해 대량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소에게 책을 읽어 주어도 소는 알아듣지 못합니다만, 소도 자신의 새끼를 돌볼 줄 압니다. 또한 닭은 부화된 병아리들을 이끌며 먹이를 주지만, 타조는 사막에 알을 낳고는 개의치 않고 그냥 떠납니다. 그러나 달릴 때는 말 탄 자 보다 빠릅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작품이요 의지의 반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이끌려 결정하는 예가 훨씬 많습니다. 즉 감정의 동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나 교회는 편애나, 거치른 말, 이유 없는 벌 등으로 자녀들이 분노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대신 “나는 부모에게 귀한 존재다”라는 사랑의 감정을 갖고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정을 포함한 세상은 사랑의 훈련장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남에게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희생이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이들만이 참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요14:14, 공동번역).
2021/03/19
잠언12:22
“주님은 거짓말을 하는 입술은 미워하시지만, 진실하게 사는 사람은 기뻐하신다.”(새번역)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감찰하시어, 거짓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시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미워하신다” 라는 단어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그분을 구역질나게 하여서 그들을 제쳐버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하는 입술(들)”이란 어리석은 자들(바보들)을 지칭하고, 그들은 신뢰할 수 없는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그들이 가진 자기 중심적 성향은 의도적으로(19절) 혹은 의도치 않았던(17절) 간에 상황을 왜곡시키게 만듭니다. 그 반면 “진실하게”란 말은 신뢰할 수 있는 성품에서 솟구쳐 나오는 선한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기뻐하신다”라는 단어는 주님께 인정을 받아서, 그분이 주시는 보호와 축복을 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잠언의 가장 중요한 점은 온 세상의 주인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무신론 자들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축복과 심판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시고 집행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합니다. 참으로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이신 후에 능히 심판하여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진실하게 살았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전혀 손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공입니다. 우리들은 마지막 날 주님을 대면할 것이기에,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온 세상을 다 얻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골1:10,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