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3/08 – 12)

2021/03/08
시편11편 – 믿음과 진리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이 마당에, 의롭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공동번역)

아무런 잘못도 없이 왕 사울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한 다윗이 산 속에서 숨어지내는 상황이 연상됩니다. 그 상황은 매복한 적에게 화살을 맞을 것과 같이 위급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블레셋과 같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라는 충고를 받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보호를 믿는 다윗조차 죽을 가능성에 심히 불안하게 됩니다(1-3). 이때 늘 신실하게 살아온 다윗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분은 이 모든 상황을 감찰하시고 공정한 심판을 행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주님의 정의와 심판을 믿고 큰 안위를 가지게 됩니다(4-7). 이렇게 고백한 다윗은 계속된 사울의 추적에 엔게디의 한 굴로 피신합니다. 그때 사울은 3천명의 정예군사를 이끌고 곳곳을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울은 용변을 보러 다윗이 6백명의 군사들과 함께 숨어 있는 굴로 들어왔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는 것은 쉬웠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수를 네 손에 붙일 것이라는 신탁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안전하게 굴을 나가도록 부하들을 단속까지 합니다. 이후 한 번 더 다윗은 자신을 수색하는 사울을 살려주면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고 고난의 길을 선택합니다. 결국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손에 죽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이는 고난의 과정에서 다윗이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의로우신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되 사사로운 지혜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의로우셔서, 정의로운 일을 사랑하는 분이시니, 정직한 사람은 그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다.”(시11:7, 새번역).


2021/03/09
성탄절이 가까워졌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그 사람들 아직도 집을 못 구했어요?”

정말 어린 학생다운 순진한 질문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집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사렛에 정착하였다고 하니 집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집 가족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땅 위에 있는 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진리입니다. 공수래 공수거! 오래 전 미술개론 시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참 재능 있어 일본에서 상당한 이름을 떨친 어떤 한국 미술가가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예술에만 정진을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분은 결혼을 하지 않아 가정이 없었고, 혈육이라고는 여동생 하나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날 “인생은 공이다”라는 편지가 자신에게 와 급히 찾아 갔더니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습니다. 이분은 살아 있을 때는 거주할 집이 있었지만,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갈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끝을 바라보고 현재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 중, 아니 온 인류 중에 오직 한 분만이 다시 살아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영원한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수님의 가족들은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소망을 가지고 땅에 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이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


2021/03/10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녀 아멜리가 여덟 살 때 이스라엘을 며칠 방문하고는,
“이곳은 고양이들이 할퀴지 않고, 개들이 물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착한 나라예요.” 그러나 후에 고양이를 만나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하고 난 후 아멜리는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어떤 고양이는 할퀴지만, 아마 그들은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온 고양이들일 거예요.”

우리는 역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 방문하고 나쁜 일을 경험한 뒤, “이 나라 국민성은 아주 나빠.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어디있어?”라고 말하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나라의 국민성은 나쁘지만, 더러는 좋은 사람도 있구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인 것은 분명하나, 어느 정도의 한계 내에서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개개인 안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 것과 같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악인과 선인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서로 깊은 밀착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입니다. 누가 선하고 악하냐는 동기에까지 파고들어야 판단할 수 있는 아주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시면서 마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역시 가룟 유다를 선택하시고,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실 때까지 가룟 유다에게 선을 베푸시고 인내하셨습니다.  우리는 흑백논리를 넘어 지혜를 가지고 선을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아 행하신 하나님 아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13:49).


2021/03/11
범브란트 목사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복음을 전혀 모르는 러시아 장교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에게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침례, 산상수훈, 비유, 기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던 그 장교는 매우 기뻐하여, 방안을 빙글빙글 돌며 외쳤습니다.
“요정같이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나는 이때까지 이런 것들을 모르고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러자 목사님은 배반당하시고,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채찍질 당한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실로 그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증거를 예수님에게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는 말에 그 장교는 찬성하였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제 구주를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죽고 말았으니까요.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여주었을 때 비로서 그의 얼굴은 다시 환하게 빛났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사람을 웃고 울리게 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모든 민족에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단군신화, 을지문덕 장군, 이순신 장군, 세종 대왕과 같은 이야기로 묶여져 있습니다. 이야기 없이 제대로 형성된 민족이나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 아이들에게는 끊임없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그들이 자라면서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집필된 동기였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


2021/03/12
잠언12:21절
“의인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지만, 악인은 재난에 파묻혀 산다.”(새번역)

이 잠언은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20절과 함께 볼 때 속임을 베푸는 자(악인)와 화평케 하려는 자(의인) 사이에 서로 다른 운명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의할 부분은 “의인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악인이 의인에게 해악을 의도하여도 의인에게는 아무런 해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예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부활을 하여 받는 마지막 심판을 전제로 할 때 이 약속은 참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날에 흠 없는 정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결국 현재 뿐만 아니라 다가올 시대를 통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최선의 것에 도달하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들과 협력하여 모든 것들이 선에 이르도록 일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롬8:28). 그 뿐이 아닙니다. 만유의 통치자인 주님은 우리가 시험받을 때 붙들어 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구해주시고, 더 나아가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한편 잠언은 “악인은 재난에 파묻혀 산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현실에서의 괴리를 목격하지만, 확실한 것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전제할 때 악인에게 발생하는 가장 무서운 일은 형통입니다. 왜냐하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홀연히 찾아와 악인을 데리고 갈 때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영원한 심판뿐입니다. “죄인들을 보고 마음 속으로 부러워하지 말고, 늘 주님을 경외하여라. 그러면, 너의 미래가 밝아지고, 너의 소망도 끊어지지 않는다.”(잠23:17,18,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