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2
시편 10편
“악인이 으스대며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악인은 스스로 쳐 놓은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 들게 해주십시오.”(시10:2, 새번역)
시편 9편에 이은 10편 중심에는 악인에 대한 다가올 심판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먼저 시편기자는 세상에 편만한 악인들의 행위를 보고 재판장이시며 왕이신 하나님께서 왜 멀리서서 심판을 신속하게 집행하시지 않는지 질문합니다. 이렇게 심판이 지체되니 악인들은 탐욕과 포악을 행한 뒤 말하기를 “하나님은 죽었다”(4), “하나님은 보고 있지 않는다”(11), 그리고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13) 등, 주님을 모독하고 안심한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정의를 집행할 것을 요청하는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고 행동하셔서 세상이 정화될 것이나(16-18) 의인들은 그분을 기다려야만(15) 한다는 신뢰와 믿음의 가르침을 줍니다. 시편기자의 탄식과 같이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으나, 응답이 더딘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때가 진정한 믿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전파에 심히 방해가 되는 장애가 몸에 있자 간절히 3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고쳐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 9)는 십자가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후 사도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하고 그 방법은 자신의 약함 가운데 그분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한 손 아래 여러분 자신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골1:11, 새번역).
2021/03/03
러시아의 그리스도인 겐하디 말라쵸프가 선고받은 감옥 생활을 다 끝내고 석방되자 그의 가족이 찾아 왔습니다. 감옥 문에서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디로 가실거예요?”
“너희들과 같이 집에 가야지”
“아녜요, 아버지가 계실 곳은 바로 여기예요.”
“왜 그러니? 우리가 같이 살게 된 게 기쁘지 않니?”
“기쁘지 않아요. 전 언제나 아버지가 계실 곳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감옥이란 말을 들어왔어요”
이 딸은 아버지가 감옥에 간 후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산 경험이 없습니다. 비록 부녀 관계라 하더라도, 삶을 함께 나누지 못하였다면 서먹서먹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같습니다. 만약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신 그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창조와 심판의 하나님은 되실 수 있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 함께 동행하시는 구속의 하나님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와 사망 가운데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으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삶에 대한 공통의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겪으셨으며, 속죄의 대업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당신의 임재이신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셨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 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상황이 생각과 달리 여의치 않아도 주님을 신뢰하고 바른 길을 걸어가십시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16:1, 새번역).
2021/03/04
신앙으로 감옥에 갇힌 미쉘 사크하로브에게 아내와 딸이 면회하러 갔습니다. 미쉘은 자기 딸을 향해 팔을 뻗으며 “애야 이리 와라” 하자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매달리며
“나는 저 사람에게 가기 싫어요. 난 아빠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아빠는 아주 미남이었어요. 빼빼 마르고 주름살 투성이의 이 사람은 아빠가 아니에요.”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늘 보고 싶어하는 분을 몰라보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 자녀들만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은 사랑했으나, 종의 형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힘 없는 아기로 나셨고, 양부 요셉 역시 목수로 보잘 것 없는 계층이었습니다. 더구나 나사렛이란 산 동네에서 선생 없이 자라시자 예루살렘의 지식인들은 무시하였습니다. 한편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신 후 전도하시다가 고향 나사렛에 들려 회당에서 설교하자,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이며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저 사람의 누이동생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않느냐?”(막6:3) 하면서 고향 사람들 역시 주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승천하여 섭리 가운데, 여러 모양으로 – 가난하고, 실패하고, 병들고, 연약하며, 의 때문에 핍박당하는 모습 등 – 지금도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만약 해외 선교사 부부가 왔을 때 손님 대접을 잘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집에서 극진히 섬기는 것은 코로나 상황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비용이 들더라도 호텔에 숙박시켜야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빌1:10-11a).
2021/03/05
잠언12: 20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이 잠언은 악을 도모하여 고통을 가하려는 자들과 화평을 위해 권고하는 자들을 대조하면서, 전자에게는 ‘속임’이, 후자에게는 ‘기쁨’이라는 마음의 상태가 그 특징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속임을 꾀하는 자들은 진실한 기쁨을 가질 수 없지만, 화평을 도모하는 자들은 자신의 권고가 상대방은 물론 공동체의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가져온다고 믿기에 희락이 있습니다. 여기서 ‘속임 Deceit’이란 악을 꾀하는 자들의 마음에 뿌리박혀 인격의 한 구성부분이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속이는 자들은 냉정하게 계산하여 상대방을 능숙하게 해치지만, 어리석은 자들(18절, 바보) 충동적이고 생각없이 말하는 자들로서 전자가 훨씬 악한 인격체입니다. 당연히 그런 인격에서 나오는 모든 계획은 비난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희락’이라는 단어가 나타내듯이, 악을 행하는 자의 삶에는 희락과 화평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여서 타인을 해치는 것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익의 판단기준은 가치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주인이 계시고 그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당하게 받는 재물과 명성 등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 경외하고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십시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풍성히 우리의 삶을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는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시니, 죄인의 수고도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전2:26,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