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2/15 – 19)

2021/02/15
잠언12장17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새번역)

본절은 재판을 전제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증인의 인격과 거기에서 나오는 증언이 재판과 정의에 미치는 효과는 지대합니다. 양심적인 증인은 진실을 말하여 공동체를 견고하게 합니다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재판관을 오도하여 해를 끼칩니다. 증인의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근거로 재판관은 확신을 가지고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한편, 거짓이라는 말은 단순한 거짓말 정도가 아니라, 재판에 영향을 미칠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당연히 의도성이 담겨 있습니다.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도 증인의 말이 중요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던 구약 시대에 “사건을 목격하였다” 혹은 “그런 말을 들었다”라는 증인의 말은 처벌을 내리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사형집행도 가능하였습니다. 이 반면 그가 거짓 증인으로 밝혀진다면, 그 거짓증언을 통해 피고에게 의도하였던 해악을 동일하게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6-19). 그러나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권력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비시850년경 아합 왕 때 일어난 나봇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속임수’란 재판관을 오도하여 정의를 좌절시키는 말들을 지칭합니다. ‘속임수’가 통하는 그 사회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3-34).


2021/02/16
6살 된 도로시는 어머니가 자신의 인형 ‘엘리자벳’을 그냥 인형으로만 생각해야 한다는 말에 항의하였습니다.
“그녀는 인형이 아니라 소녀란 말예요. 그녀가 만약 그냥 인형이라면 내가 그녀에게 기저귀를 채우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자벳은 그냥 인형이 아니예요”

물론 도로시의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세상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도로시의 생각이 현실화 되는 메타버스(가상 우주)게임에서는 그 인형이 소녀로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상 우주 공간은 인간이 만든 그야말로 가상의 세계이고, 우리가 숨쉬고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현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입니다. 이 현실 세상에서는 우리가 주장한다고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규정에 합당하여야 비로서 작동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의미부여’정도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시각(철학, 관점, 세계관)에서 만물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여한 의미를 토대로 자신들의 삶을 전개해 나가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열매들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세상이 우연히 생겼다거나 아니면 모르겠다 등의 전제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의 생각과 틀리게 되면 어린 도로시의 생각과 같게 됩니다.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인의 이성은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전제로 사고하기 때문에 인형은 인형이고 사람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며 그에 합당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지혜이며 성숙한 이성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롬1:22, 새번역).


2021/02/17
여섯 살 된 소년이 부모와 같이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습니다. 식사 도중에 아이가 여주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여사님, 요리가 맛이 없어요 정말 요리할 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고 하셨지만,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잘못 이해한다면 위의 어린 아이와 같이 말하게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었지만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성경 역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통해 발명한 문자와 문학 그리고 상식 역사 철학 등이 도구가 되어 기록되었음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각 권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문학작품이요 역사책이고 철학(신학)책입니다. 시편이 그렇고 잠언이 그러하며, 욥기, 에스더, 신명기, 요한복음, 로마서, 사도행전 등이 그러합니다. 어린 아이는 도저히 이런 성경들을 쓰거나 이해할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와 관련한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에 주님은 하나님 사랑괴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한 율법사는 그런 삶이 번제와 제물보다 더 낫다고 동조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하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고백과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깨달음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면 나는 빠른 시일 안에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오만방자한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아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고전4:19-20).


2021/02/18
미하이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외관이 허름한 식당에 외식을 하러 나가자, 식당을 본 알렉스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누추한 식당으로 데리고 가세요?”

그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니 모든 것이 깨끗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알렉스는 자기가 식사 기도를 하겠다고 자청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당신께서 좋은 교훈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바깥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흉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언제나 안을 볼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안을 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극작가 도로시 세이어즈(1893-1957)는, “… 지적이고 호소력을 지닌 배우가 대사 속에 자기만의 개성을 불어넣어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창조적인 극작가에게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또한 배우가 난해한 해석을 적절하게 해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대단한 즐거움이다.”(창조자의 정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세상에서 살아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소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온갖 모험, 스릴, 고난, 기쁨, 슬픔, 고통, 두려움, 삶과 죽음 등이 존재합니다. 자유의지가 등장 인물 각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각자는 반응에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러 난관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났지만, 인내하면서 통과해 내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욥의 모든 역경을 돌이켜주셨습니다. 당연히 우리 역시 삶의 여러 부분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고전12:20, 새번역).


2021/02/19
잠언12장 18절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 (새번역)

잠언은 사려깊은 언어 사용을 격려합니다. 그 방법은 생각 없이 쏟아 내는 말이 주는 정신적 상처를 비수에 찔린 치명적인 육체의 상처와 대비시키거나, 혹은 사려깊은 말이 미치는 좋은 영향을 육신의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양약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말이나 혹은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은 잠언에서 바보들이나 하는 반응이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한편, ‘비수(검)’는 죽이기 위하여 고안된 전투 무기로서 의도적이고 무정한 살인자를 상징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혜로운 자의 말(혀)은 치료제입니다. 이 비유는 해로운 갈등들을 풀어서 화목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존 빌립 목사님은 차를 몰고 2틀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친구 부인이 암으로 임종 직전에 있었고,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인의 죽음이 자신의 약한 믿음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친구를 만나 고린도전서3:21-23을 펴서 “메리가 죽어가고 있으나 그 죽음은 네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고 말하여주었습니다. 사실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인 동시에 선물의 성격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말기 암에 걸린 메리에게 죽음은 고통을 잠잠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약과 구약’이라는 좋은 ‘약’이 있어 사람들을 치료하기 너무나 좋은 위치에 있음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엡4:29,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