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2/08 – 10)

2021/02/08
시편 7편
“주님께서는 뭇 백성들을 판단하시는 분이시니, 내 의와 내 성실함을 따라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8절, 새번역)

이 시는 원수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탄원시입니다. 시편 기자의 적들은 사자 같이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피신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하나님의 법정에 선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악행을 한 피고들을 심판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무죄한 자들을 놓아주실 것을 확신하며 감사와 찬송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재판장이라는 믿음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사상은 시편에서 거듭거듭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두려움과 가슴이 철렁하는 경악감 대신 신뢰와 위로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묵상하라고 우리를 초청합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그 피난처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임재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가볍게 그리고 경솔하게 취급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판관 포청천 앞에 선 원고나 피고 모두 떨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우리 자신의 죄의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도록 합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과업을 마치시고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롬8:34, 현대인의 성경).


2021/02/09
미하이가 어렸을 때 늘 중간에 자면서도 철야기도회에 따라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배가 너무 짧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가 종종 한 말입니다.
“교회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생을 교회에 가서 사는 게 어때요? 교회는 우리의 놀이터가 되어야 해요.”

미하이는 정말 교회가 놀이터인 양 행동했으며, 어느 주일 예배 때에는 도를 넘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에 오자 미하이를 징계하기로 한 뒤 엄히 물었습니다.
“네가 목사의 아들이라서 버릇없이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빠는 내가 설교를 듣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들었어요.”
“좋다. 그럼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아빠는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열심히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렇게 하셔야 해요.” 목사님은 더 이상 야단 칠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의 위대성이 여기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벌써 3년이 흘렀습니다. 정치자금법을 위반하여 5천만원을 받았다고 수사를 받던 한 정치인은 당과 동지들에게 너무 미안하여 아파트 17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여비서가 성추행 당하였다고 고소하려고 하자 그 날로 산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 서울시장도 생각납니다. 이분들에게 세상 것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가 탄로나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가올 심판의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용서의 근거를 만드시고 또 한편으로는 심판할 준비를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이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눅 24:45, 현대인의 성경).


2021/02/10
잠언12장17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새번역)

본절은 재판을 전제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증인의 인격과 거기에서 나오는 증언이 재판과 정의에 미치는 효과는 지대합니다. 양심적인 증인은 진실을 말하여 공동체를 견고하게 합니다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재판관을 오도하여 해를 끼칩니다. 증인의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근거로 재판관은 확신을 가지고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한편, 거짓이라는 말은 단순한 거짓말 정도가 아니라, 재판에 영향을 미칠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당연히 의도성이 담겨 있습니다.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도 증인의 말이 중요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던 구약 시대에 “사건을 목격하였다” 혹은 “그런 말을 들었다”라는 증인의 말은 처벌을 내리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사형집행도 가능하였습니다. 이 반면 그가 거짓 증인으로 밝혀진다면, 그 거짓증언을 통해 피고에게 의도하였던 해악을 동일하게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6-19). 그러나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권력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비시850년경 아합 왕 때 일어난 나봇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속임수’란 재판관을 오도하여 정의를 좌절시키는 말들을 지칭합니다. ‘속임수’가 통하는 그 사회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