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2/01 – 05)

2021/02/01
시편 6편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5절)

이 다윗의 시는 초대교회에서 읊은 일곱 개의 참회 시 중 하나입니다. 사순절(부활주일 전 40일)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그 일곱 개의 시편들을 읽고 노래한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관행이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와 함께 이로 인한 감정적인 괴로움을 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탄원합니다. 3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병과 근심에서 구원해주시기를 호소하는 탄원(1-5), 시편기자가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묘사(6-7),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인한 승리의 선언(8-10).

시편 기자는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만약 주님의 구원이 없다면 자신은 죽어 ‘스올’에서 거처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려주시기를 절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스올’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죽으면 내려가는 장소입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도 없고, 어둡고 소망 없는 곳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계시를 가진 시편기자도 놀라고 있는데, 하물며 구약도 없는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이 반면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새 창조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맹인에게 빛이 돌아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고난은 그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성숙함과 고난을 당하는 분들 앞에서 함께 울고 기도해 주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망과 고통 그 자체는 인류의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3-4).


2021/02/02
범브란트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네 살 가량 되었을 때 가족이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미하이가 도중에 공중화장실을 다녀오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기 책임자는 좋은 그리스도인이에요. 사람들이 자기 집을 냄새나게 만들어도 가만 있어요.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린 미하이의 표현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것입니다. 미하이는 공중화장실에서 냄새가 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책임자에 대하여 오히려 좋은 말로 표현해 주었습니다. 실상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가난한 사람, 세리와 죄인과 같이 멸시를 받는 사람,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을 존중하고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의 임금들은 사람들을 주관하고, 집권자들은 은인이라고 칭함을 받으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셨습니다(눅22:24-27). 우리로서는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고 이 말의 의미를 깨닫는데 평생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범 되신 주님은 훌륭하게 이를 행하시고 속죄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깨닫고 본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만들어진 새로운 종(種)이요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2021/02/03
미하이가 다섯 살 때 범브란트 목사님은 그를 심히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는 네 이름이 적힌 페이지가 있다. 그 페이지에 하나님은 네 죄를 낱낱이 적어 놓으신다. 거기에 그저께도 하나 적혔고, 어제도 하나 적혔는데, 너는 오늘도 다시 죄를 지었다.”
미하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빠는 하나님이 내가 저지르는 나쁜 짓만 써 놓으신다고 생각하세요? 착한 일은 써 놓지 않나요?”

미하이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법을 어긴 사람만 단속하는 경찰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인 동시에 해로운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잘 한 행위를 기록해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바로 이 측면을 단단히 붙잡고 소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나그네 3명을 대접한 뒤 알고 보니 주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주님은 소돔을 심판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정의로운 심판자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드린 후, 의인의 수를 계속 낮추다가 10명까지 허락을 받았습니다. 즉, 10명의 의인만 있다면 소돔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의인이 없던 소돔 성은 불과 유향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반면 어떤 성인은 주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때, “주여, 제가 잘한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늘 유념하여야만 할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2021/02/04
어떤 아이가 동전 두 개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갖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가서 헌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동전 두 개를 손에 쥐고 교회로 가다가 도중에 넘어져 동전들을 떨어 뜨렸는데, 하나는 도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하나님 미안합니다만 하나님의 동전을 찾을 수가 없네요”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테스트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니엘입니다. 17살에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은 섭리 가운데 왕립학교에서 3년을 공부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아~ 그런데, 학생들에게 주는 음식 특히, 고기와 포도주는 모세율법의 규정상 먹을 수 없어서 – 우상에게 미리 바쳐진 음식 등의 이유 – 마음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청년들이 고기를 먹지 않고 어떻게 튼튼하게 자라겠는가?”라는 환관장의 입장 역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로에 섰습니다.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순교를 무릅쓸 것이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섭리 가운데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보고자 음식 담당자에 10흘만 채식을 주어 비교해 보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담당자의 입장에서 채식으로만 목적이 달성되면 그 보다 좋은 것은 없기 때문에 시험을 허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더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도록 만드셨고, 이들의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지혜와 지식의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여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2021/02/05
잠언12장16절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16절은 15절의 서론적 교훈을 언어와 관련한 도덕과 신학을 다루는 부분들(17-22절)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중심적 교훈은 다양한 환경에서 가지게 되는 위험한 감정(분노 등)들을 잘 통제하라는 권위적 충고입니다. 랍비 일레아지는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컵, 지갑 그리고 근심을 살펴보라고 합니다. 즉 마시는 동안, 돈 거래를 하는 동안, 내적으로 흥분상태에 있을 동안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해 보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fool)는 몸짓과 언어로 자신이 얼마나 옹졸하고 배우지 못하였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는 분노 때문에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슬기로운 자는 모욕을 무시합니다. 여기서 무시한다는 히브리어 ‘코세’는 ‘덮어 보이지 않게 하다 혹은 보호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는 격한 감정에 휘둘려 구경 거리가 되느니 참아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이 가져오는 위험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자를 못 본체 하는 것입니다. 이어 나오는 여러 구절(17-22절)에서 지혜자는 이런 지식을 근거로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모든 상황에 반응할 수 있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살아가는 마을에서 결국 그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보인 자제력으로 인하여 선한 결과가 도래되어 그의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악한 자를 벌주려고 광분 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의 교훈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