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1/25-29)

2021/01/29
잠언12: 15절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행실만이 옳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새번역)

12장의 두 번째 단락은 말(16-23)과 행위(24-27)가 맺는 열매들을 다양하게 언급하면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15절은 서론입니다. 본절은 ‘지혜로운 사람”와 “어리석은 사람”을 권위가 있는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여부에 따라 정의합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의 대표가 잘 고치는 의사입니다. 이분들이 건강에 관한 준 충고와 처방을 무시하고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사람이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에서도 같습니다. 사랑과 진실함을 늘 베풀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잠언의 거듭된 가르침을 무시하는 사람 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습니다.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면 건강을 잃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면 영혼을 잃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어리석은 자의 경우 거만하여 충고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바보들, 특히 거만한 바보는 자신의 길이 올바르다고 확신합니다만 실상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확증편향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이 자신만의 파라다이스에서 사는 정신병자들입니다. 이 반면 지혜자는 자신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때문에 권위있는 사람의 충고를 귀 담아 듣고 자신의 길을 바꿉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근력이 다져지며, 인자와 진리는 그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 마지막은 심판날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칭찬입니다. 우리는 이것 하나를 받으려고 전 인생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24:21, 새번역)


2021/01/28
어떤 소년이 “하나님은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자, 8살쯤 된 그리스도인 소년이 말하였습니다.

“아냐, 할 수 있어. 하나님도 한때는 너와 나처럼 요셉과 마리아의 집에서 자라는 어린 소년이었어. 그분들이 그에게 매일 말과 행동으로 사랑하고 정직하라고 가르쳤어, 만일 예수님이 어떤 다른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악한 부모들이 그에게 욕하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술마시는 걸 가르쳤을거야. 우리가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어.”

이 아이는 자신도 모르면서 매우 심오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예수님을 선한 길로 가르쳤을 것이고, 어린 소년이었을 때 우리 주님 역시 겸손하게 배우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역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강보에 싸여 무력하게 울고 있는 어린 아이가 시간과 공간과 만유를 ‘그 능력의 말씀으로 붙잡고’(히1:3)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실까? 이것이 우리 지식과 논리의 한계입니다. 18세기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건륭황제가 여름에 피서하는 열하에 가서 생전보지도 듣지도 못한 짐승들 – 코끼리(?). -을 보고 “어떻게 이런 동물들이 있었을까?”는 감탄을 발하였습니다. 세상 일도 이런대 하물며 하나님의 진리를 어떻게 이성으로 모든 것을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말한 것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비로서 온 우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성도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골1:27, 새번역)


2021/01/27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 일곱 살의 알렉스가 할아버지에게 들려 준 설명입니다.

“경기를 하는 동안엔 우리편이 지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마지막 몇 초 동안에 경기가 반전되어 우리편이 이길 수도 있어요.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도 마찬가지예요. 성 금요일엔 하나님이 완전히 진 것 같았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태를 반전시켜, 부활 주일 새벽에 하나님께서 마귀의 골 문에 공을 던져 넣은 거예요. 결국 경기가 끝났을 때 하나님이 승자였어요.”

어린 알렉스의 훌륭한 비유입니다. ‘사망’이라는 단어는 모든 인간사의 마지막 말이요, 절망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진실로 사망은 끝판왕입니다. 죽은 자를 누가 기억합니까? 전도서 기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영원히 기억되지는 못할 것이며 언젠가는 다 잊혀지고 말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도 죽음에 있어서는 어리석은 사람과 마찬가지이다.”(2:16)라고 쓰면서 한탄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사실과, 죽은 후의 하나님의 심판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우리 몸이 죽는 원인은 아담이 범한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받는 심판은 우리 자신이 세상에서 살 때 범한 죄들입니다. 아담을 핑계로 둘러댈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루시기 위함이요, 그분이 부활하신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에 선고된 사망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문제로 너무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2021/01/26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녀 아멜리는 요나가 어떻게 해서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왔나를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 손녀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제법 자신 있는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나는 선지자였어. 그 말은 그가 상당히 똑똑했다는 뜻이야. 그는 배에 탔을 때, 배들이 종종 가라앉는다는 것과, 그러니까 자기도 어쩌면 고기에게 잡혀 먹힐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안전을 기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주머니에 빨간 고추를 넣고 탔지. 그가 고기의 코에다 고추를 밀어넣으니까, 고기가 기침을 하게 되는 바람에 그가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거야.” 어린이의 말이지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요나의 구출 사건은 기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고 부활하실 예표적 사건입니다. 이런 현상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만을 바라고 실생활에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아멜리의 빨간 고추만큼이나 우스꽝스럽습니다. 실로 이런 태도는 별다른 사정이 없는 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삶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반면 이 사건에서 우리는 불순종하고 완악한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워야 합니다. 즉,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선지자적인 선포를 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가다가 그만 폭풍우를 만나 결국 물속에 던져졌습니다. 죄인 요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물고기를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 풍랑이 몰아치는 이 어려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늘 돕는 분이시다”는 가르침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가 체험한 기적을 체험하려고 노력하지말고, 요나 사건의 가르침을 섭리 가운데 배우려고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며 환난 때에 언제나 돕는 분이시다.”(시46:1, 현대인의 성경).” 


2021/01/25
시편 5편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5:12, 새번역)

이 시는 구원을 위하여 탄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3절을 보면 이 시는 아침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탄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확고하게 뿌리박은 다윗의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5장은 구원에 대한 간구로 시작하여(1-3), 악인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먼저 선포합니다 (4절). 그리고 그 성품을 기준으로  악인들에 대한 심판(5-6, 9-10)과 의인들이 가지는 소망 (7-8, 11-12)을 노래합니다. 결론으로 주님께서 바르게 살아가는 자신을 복주시고 방패와 같이 안전하게 보호하심을 확신합니다(12). 이와 같이 시편 5편은 하나님의 왕되심과 공의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3천년 전 다윗 왕의 시대나 첨단기술문명의 시대인 21세기에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통치하십니다. 구글의 초창기 야후에게 기업 인수를 요청하였지만, 야후는 거절하였습니다.  만약 구글의 미래를 알았더라면 야후는 몰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후 영원한 나라로 대체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불안정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소망은 주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두어야 합니다. 그분의 성품은 우리로 악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두려움을 주지만, 또한 정직한 삶에서 만나는 큰 문제에 산성과 같은 피난처가 되십니다. 늘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명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우리의 힘이시며, 어려운 고비마다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시46:1, 새번역).